국내 시가총액 1위 기업, 삼성전자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기업이다. 그런데 삼성전자 노동자가 아프다. 함께 일하는 동료 간 서열을 매기고, 경쟁을 부추기는 고과제도 탓이다. 산재·육아휴직을 다녀오면 하위 고과를 받았다. 노동자 3명 중 1명은 삼성 고과제도의 신뢰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삼성전자 고과제도로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하는 노동자를 인터뷰하고 2회에 걸쳐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을 싣는다. 금속노조가 수행한 ‘삼성 고과 제도의 현황과 폐해 실태 연구’도 입수해 공개한다.<편집자>
9년 만에 서울 한강대교 지점에 홍수주의보가 내렸던 2020년 8월7일 오후 9시께. 삼성전자 노동자 김정진(가명)씨는 경기도 화성시 집에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 뒤로 열심히 일해도 하위고과가 반복되고, 친했던 동료도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 하는 상황에 놓이며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때였다. “걷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걷다 보니 울시 용산구 N서울타워(남산타워)가 눈앞에 있었다. 집에서 나온 지 13시간이 지나 있었다.
“힘들면 쉬면서 담배도 한 대씩 피우고, 끊었다가 또 피우고 계속 걸었어요. 처음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나중엔 아무런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13시간을 걸으니, 해냈다는 성취감도 생기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던데요.”
“그날 이후 10년째 하위고과 반복”
문제제기에 상사는 “능력 없음 인정하라”
정진씨는 요즘에도 최소 한 달에 한 번, 2주에 한 번씩 5~6시간씩 걷는다. 가족들은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줄로만 알지만 걷기는 회사생활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다.
정진씨는 10년 가까이 하위고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업무가 끝난 뒤 동료와 함께 술 한잔 하며 크게 다퉜는데, 그 사실을 인사팀이 알게 된 뒤란다. 그해에도, 이듬해에도 정진씨는 하위고과인 ‘라’ 등급을 받았다. “저는 평가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었어요. 진급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내는 타입인데 10년 정도 하위고과를 받으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있잖아요.”
삼성전자와 삼성SDI 등 삼성그룹은 한 해 업적평가와 역량평가를 종합해 고과(가~마 등급)를 평가한다. 고과에 따라 성과급이 결정되는데, 임금이 동결되는 라 등급부터 마 등급까지 하위고과로 칭한다. 이런 고과 등급이 쌓여 임금과 진급 여부를 결정한다.
신규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해 다 등급을 받았던 때도 있었다. 지난 문제로 이어진 인사상 불이익은 끝났다고 생각해 기뻤다. 그런데 직후 고과평가에서 또다시 마 등급을 받았다. 라 등급보다 낮은 등급을 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관리자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었다. “인간관계를 잘 하라”는 말도 들었다.
정진씨는 “일은 똑같이 하는데, 그 다음해에도 라 등급를 받고, 그 다음해에도 반복됐다”며 “ER(노무)팀에 이야기한 뒤에 다 등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 또 계속 라, 라 등급을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업무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러려니 하는데 능력 없다고 인정하라고 하고 인간관계를 잘 하라는 소리만 하니까, ….”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병가 쓰자 돌아온 하위고과”
삼성SDI 노동자 현진수(42·가명)씨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워도 좀체 잠에 들지 못한다. “심장은 빨리 뛰고 몸이 깨어 있는 상태”로 억지로 눈을 감기 일쑤다. 신경안정제와 근육이완제는 내성이 생겼는지 먹어도 효과가 없다고 한다. 2~3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몸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 “기절하다시피” 잠에 든다.
진수씨가 수면장애를 겪은 것은 병가 이후 직장에 복귀하고, 낮은 고과를 받은 뒤부터다. 2015년부터 10~15킬로그램의 중량물을 옮기는 작업을 반복하던 그는 왼쪽 어깨 연골이 파열돼 2017년 1월 수술을 받았다.
산재는 신청하지 않았다. 산재신청 절차도 몰랐고, 왜 중요한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파트장에게 “회사 생활 30년 넘게 남았는데 산재 처리 해서 남은 회사 생활 어떻게 하려고 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산재신청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연차와 병가를 사용하며 병원 진료와 치료를 다녀야 했다.
수술 후 회복이 필요해 두 달가량 병가를 냈던 그는 그해 결국 하위고과 등급을 받았다. 진수씨는 “다른 친구와 비교할 때 근무일수가 적어 (고과) 경쟁이 안 된다고 했다”며 “그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고 회상했다.
2018년 업무 중 동료와 갈등을 겪고, 동료에게 욕설과 폭행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진 뒤에 상황은 더 악화됐다. 가해자와 함께 그룹장, 파트장, 반장이 징계를 받았다. 진수씨의 고과가 좋게 나올 리 없었다. 불면증과 함께 불안장애에 시달리던 그는 2021년 3개월 병가 뒤 회사에 복귀했다. 하위고과가 또 그를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하위고과를 받은 이유를 병가·휴직으로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10명 중 8명 “고과제도 신뢰 안 해”
‘삼성 고과제도 현황과 폐해 실태 연구’
“하위고과 노동자에 심리 공포 유발”
비단 정진씨와 진수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삼성 노동자들의 인사제도 불신은 심각하다. <매일노동뉴스>가 5일 금속노조가 수행한 ‘삼성 고과 제도의 현황과 폐해 실태 연구’를 입수해 보니 삼성전자·삼성SDI 노동자 10명 중 7~8명(75.1%)은 고과제도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신뢰한다는 응답은 7.7%에 불과했다.
이번 연구는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동자권리연구소 연구위원, 주민영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현석 금속노조 미조직전략조직실 전략조직부장이 참여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수행했다. 연구진은 누군가는 반드시 하위고과를 받을 수밖에 없는 평가제도로 임금과 진급 여부를 결정하면서, 하위고과를 받는 노동자에게 심리적 공포를 유발하고 개인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했다.
연구진은 삼성전자(354명)·삼성SDI(91명) 노동자 445명을 조사했다. 설문 참여자는 ‘고과평가는 신뢰할 만하다’를 5점 척도로 묻자 75.1%가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고과평가가 개인의 노력을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항목에도 부정적 응답은 76%로 높았다. ‘고과평가가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데에 67.9%는 부정적인 응답을 내놓았다.
‘고과평가는 최근 6개월 기준이지만 과거의 실수를 반영한다’고 본 응답자도 49.3%나 됐다. 직장생활 중 한 번의 실수가 오랜 기간 고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진수씨나 정진씨의 증언은 극소수 의견이 아닌 셈이다.
연구진은 “업적평가와 역량평가시 NI등급(하위고과) 평가가 상급자에 의해 이뤄지는 구조이고, 계량화돼 있는 평가점수가 아니기 때문에 상급자의 주관성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될 수 있다”며 “이러한 이유에서 실태조사에서 상급자의 고과평가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응답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최근 6개월 기준 고과평가지만
과거 실수 반영한다” 2명 중 1명 긍정
지난해까지 시행된 삼성의 고과평가는 업적평가와 역량평가로 나뉜다. 업적평가 등급은 EX(Excellent)·VG(Very Good)·GD(Good)·NI(Need Improvement)·UN(Unsatisfactory)으로 구분되고, 성과급 결정의 근거가 된다. 연봉제 직원과 월급제 직원(CL1)의 비율 차이는 있지만 EX~NI는 평가등급별 적용 비율이 정해져 있다.
진급에 영향을 주는 역량평가는 사원(CL1)·대리(CL2)·과장(CL3)·부장(CL4) 중 직급 CL2 이상에 시행된다.
CL2 이상 연봉제의 업적평가와 역량평가 등급은 EX(10%)·VG(25%)·GD(55~60%)·NI(10% 이내)·UN(절대평가)으로 정해져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하위고과를 받는 구조다.
한 해 동안 치뤄진 업적평가와 역량평가를 합산해 고과평가(가·나·다·라·마) 등급이 결정되는데, 하위평가인 NI 등급은 임금이 동결되는 ‘라’ 등급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하위고과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연구진은 “승격(진급)은 보통 3년 치 고과를 평균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NI를 받게 되면 매우 불리한 구조”라며 “NI를 받는 것을 만회하려면 EX나, VG를 2개 정도 받아 만회해야 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아 NI를 받게 되면 승진 장기 누락자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NI 등급을 받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공포를 유발할 수 있으며 자괴감 등 개인의 정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덧붙였다.
올해 신인사제도 시행되지만…
“경쟁적 인사시스템 진화 가능성”
삼성은 2021년 10월 상대평가 중심의 고과제도를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신인사제도를 발표했는데 노동자들의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연봉제 직원의 경우 EX 등급을 제외하고,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바꾼다고 했다. 그런데 비연봉제는 상위고과 비율을 늘리긴 했지만 상대평가를 유지하기로 했다.
연구진은 “개별성과를 측정하기 어려운 생산직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연봉제 직원들만 상대평가를 계속 유지하는 결정은 성과주의 임금체계가 현장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CL2 이상의 연봉제 직원은 역량평가 폐지, 역량진단 전환 △기존 연 1회 진행되던 피드백 대신 수시 피드백 도입 △동료평가 도입(익명, 서술형 방식) △고과등급에 따라 정해지던 기존 성과인상률을 범위 구간 형태로 바꿨다. 성과인상률을 결정하는 부서장의 권한이 강화된 것이다.
연구진은 “삼성의 신인사제도는 부서장의 권한을 더 크게 만들고, 경쟁적인 인사시스템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크다”며 “동료평가가 실제 반영되는 것도 아니고, 부서장이 참고만 하는 것이어서 평가가 아닌 감시로 변질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삼성 노동자 69.2%는 삼성의 고과평가 목적을 “관리자에게 평가 권한을 줘 회사에 충성하는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라고 응답했다.
상처 커지는 하위고과자 “사람을 안 만난다”
하위고과는 ‘낙인’으로 작용했다. 평가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평가자 눈에 들길 원하는 동료가 하위고과자를 멀리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고과평가가 정진씨와 진수씨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 배경이다. 정진씨는 “평소 친했던 친구들도 이야기하길 꺼려 하더라”며 “나한테 말하기 꺼리는 것 같은 친구한테 일부러 먼저 다가서지는 않는다”고 털어놨다. 정진씨는 “이놈이 찍혔으니까 (나하고) 이야기하면 (평가자에게)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건데, 친한 친구도 불이익을 주는 것 같고 (현장에서는) 그런 것이 좀 있다”고 주장했다.
진수씨는 “(하위고과를 받은 뒤) 사람을 안 만난다”며 “업무적으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고과를 받아야 진급이 가능한데 동기나 후배들 보는 눈도 있으니, 진급이 늦게 되면 눈치가 보인다”고 덧붙였다.
진급 결과가 공개되는 날에는 며칠 동안은 ‘진급’ 관련 이야기가 핫이슈가 된다. 정진씨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상사에 아부를) 잘 해서 승격(진급)을 했다는 말이 나오고 결국 다툼이 생기는 구조”라고 씁쓸해했다.
삼성전자쪽에 고과제도 문제와 관련해 입장을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