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휴가철이 무색하게 폭우가 수없이 많은 이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피해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이 제보영상을 통해 확인될 때마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폭우를 뚫고 출퇴근을 감행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이었다. 헤엄치듯 출근을 감행하는 직장인의 모습 속에서 과연 한국인에게 성실한 직장인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저들을 비와 땀에 젖게 만들며 직장으로 이끄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노동과 건강 문제를 연구하다보면 가장 큰 의문은 과로죽음의 현실이다. 즉, 과로사와 과로자살 말이다. 과로사(過勞死)의 영어 번역어가 일본어 발음 그대로인 Karoshi를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구조조정 등이 이루어지며 중년남성의 심장마비, 뇌졸중, 자살 등에 의한 죽음이 이어지기 시작하면서 과로사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의 현재는 어떨까. 최근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국내 과로사 사망자가 2503명으로 보고됐다(용혜인 기본소득당 국회의원). 1년에 500명씩인 셈이다. 이마저도 산재보험에 가입되지 못한 1인 자영업자, 택배기사 등은 빠져 있는 수치다.
이번 폭우 속에 생계를 위협받은 누군가가 며칠 동안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그 며칠치의 과로를 기존의 과로에 덧붙여 일하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이 앞선다. 2020년 12월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과로사 등 예방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하였고 현재는 국회에서 아직 심사 중이라고 한다. 법률이 제정된다고 과로의 압박이 사그라들지는 의문이다.
오랜 과로사 문제로 여러 분석이 시행된 일본의 경우 ‘회사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라’는 문화적 에토스가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회사를 위한 자기희생을 전시하는 것이 마치 경쟁적 게임이 된 일본의 현실비판이 한국에서는 얼마나 다를까. 자발적 과로가 자신의 긍정적 인상관리가 된 직장풍토가 옆 나라만의 일일까.
최근 한국의 과로죽음을 다룬 김영선 박사의 <존버씨의 죽음>이 출간됐다. 그는 한국에서 ‘과로-성과체계’라는 새로운 언어로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그는 수차례 반복된 한국의 과로자살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실적 압박, 괴롭힘이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자살감정은 복합적 감정의 산물이었다. 불안감, 쥐어짜임, 타들어감, 짓눌림, 무력감, 고립감. 김영선은 과거 직장에서 오로지 근면성실한 노동자를 원했다면, 오늘날은 성과를 경쟁적으로 뽑아낼 노동자를 요구한다고 지적한다. 과로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MBO(Management By Objective·목표관리)와 같은 성과중심 평가체제의 도입에 의한 결과다. 자연재해마저 염두에 두고 출근 시간을 조정하고 설사 지각을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날의 목표치를 달성해내야만 하는 현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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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한 노동에 의한 피로가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보람으로 연결되는 치유적인 피로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2012년)에서 현대인의 피로가 본래적 의미에서의 피로에서 멀어진 자기분열적 피로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그 역시 성과사회의 지표로 피로가 전락해 버렸다고 지적하는 셈이다. 내가 만났던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은 왕따를 감내하고서라도 실적에 몰두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성과만큼 월급이 결정되는 노동자가 아닌 이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끝으로 한국인이 얼마나 자기분열적인 피로 현실에 놓여 있는지 깨닫게 해준 시 하나를 소개한다. 네팔인 이주노동자 러메스 사연(Ramesh Sayan)의 ‘고용’이라는 시다. “하루는 삶에 너무도 지쳐서 내가 말했어요/ … / 이제는 나를 죽게 해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죽으렴!”
매일 바쁘다 핑계되는 사장에게 ‘죽음’을 질문한 시인의 상상력 앞에 우리는 어떤 현실을 목격할 수 있을까. 죽음에 이르는 과로보다는 달성하지 못한 실적이 더 걱정스러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소수의 이야기일까. 실적 종용의 구조가 문화로, 개인의 능력으로 치환되어 이제는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제도로 구조를 바꾼다고 몸에 체현된 과로의 습성이 일순간 씻겨갈 것인가. 더 큰 걱정은 성과체계를 고착시키기 위해 익명의 그들도 불철주야 과로를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다들 누구를 위한 과로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