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방치, 고용노동부가 면죄부 준다”

조해람 기자 입력 2022. 08. 21. 15:41 

직장갑질119 ‘직장 내 괴롭힘 내부지침’ 공개
조사의무·불리한 처우 위반에 시정기간 부여
“고용노동부, 벌칙 대신 시정기간 주며 봐줘”

경향신문 일러스트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씨는 회사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회사는 조사에 나서지 않았고 결국 A씨는 퇴사했다. 법에는 분명 “회사는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인지한 경우 지체 없이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돼 있었다. A씨는 고용노동부에 회사의 ‘늑장’을 신고했지만, 고용노동부가 회사에 내린 처분은 과태료가 아닌 ‘시정기한’이었다. A씨는 “이미 신고 후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시정기한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고용노동부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즉시 조사’와 ‘불리한 처우 금지’ 등 조치를 위반한 회사들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치를 위반한 회사에 과태료가 아니라 시정기한을 주도록 하는 내부지침을 통해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21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사건 처리지침’을 입수해 공개했다.

직장갑질119가 공개한 지침을 보면,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즉각 조사 의무를 위반한 회사에 “시정기간 25일 이내(미시정시 과태료)”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제76조2~3)에서는 회사가 괴롭힘을 인지한 뒤엔 지체 없이 사실관계를 조사해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처한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법 위반에 대해 즉각 과태료를 부과하기는커녕 25일의 ‘여유’를 주는 것이다.

직장갑질119가 21일 공개한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사건 처리지침’. 직장갑질119 제공

신고자에 대한 ‘불리한 처우 금지’ 위반에도 2주의 ‘말미’를 줬다. 근로기준법 제76조3 6항은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신고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 등에게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직장갑질119가 공개한 내부지침에는 14일의 시정기간을 주고, 이 기간 동안 시정되지 않으면 범죄로 인지한다고 나와 있었다.

이 같은 지침은 직장 내 성희롱을 조사하는 근로감독관의 집무규정보다 훨씬 느슨하다는 것이 직장갑질119의 주장이다.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을 보면, 근로감독관은 직장 내 성희롱 즉시 조사 의무 위반에 대해 시정기간 없이 “즉시 과태료”를 내릴 수 있다. ‘불리한 처우 금지’ 위반도 시정기간 없이 “즉시 범죄로 인지”하도록 규정돼 있다.

고용노동부의 느슨한 직장 내 괴롭힘 처리지침 때문에 실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장갑질119가 강은미 정의당 의원실을 통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2019년 7월16일부터 지난 5월31일까지 약 3년간 ‘신고를 이유로 불리한 처우’를 당했다는 신고는 1360건이었다. 그러나 이 중 고용노동부가 ‘혐의 있음’으로 보고 검찰에 송치한 사건은 20.1%인 274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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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갑질119는 “이 지침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는 회사의 조사의무 위반을 신고해도 25일을 더 기다려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며 “정부는 명확한 근거도 없는 내부 처리지침을 통해 법을 무력화하고 있다. 그 결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이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직장갑질119는 이 문제의 보완책을 담은 ‘직장 내 괴롭힘 조사·조치 의무 보고서’를 이날 발행했다. 조사 의무에 대해서는 행정제재와 조사 기준 마련, 비밀유지 확대 등을 제안했다. 불리한 처우를 유형화하고, 괴롭힘 조치 때 피해자 의견을 청취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았다.

박현서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지난해 10월14일 법이 개정된 이후에도 직장 내 괴롭힘 신고에 대한 사내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거나 객관적인 조사가 진행되지 못해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가하는 사례가 지속되고 있다“며 ”법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용노동부의 내부 처리지침 개정 등 시급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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