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맑아지고 물이 깨끗해졌다. 자동차로 가득 찼던 도로는 텅 비고, 어디선가 동물들이 나와서 뛰어놀았다. 거짓말 같은 평화였다. 코로나19 사태가 그간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청소를 대신 했다. 해답은 이토록 간단한 것이었다. 지구가 살 만한 곳이 되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공장을 멈춰 세우면 된다. 재난은 종종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과정은 생각만큼 평화롭게 이뤄지지 않는다. 때론 재난보다 더 거대한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누가, 어떻게 멈춰 세울 것인가는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레베카 솔닛은 폐허에서 일종의 ‘재난 유토피아’가 형성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사람들은 우애와 협동의 정신을 발휘했다. 경찰과 군대, 관료들의 명령이 사라지자 엘리트는 패닉에 빠졌지만, 민중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힘들을 보여주며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자주적 관리 역량을 맘껏 발휘했다.
하지만 폐허에서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하는 이들도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당시 뉴올리언스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학교 대부분이 폐허가 됐지만, 한편으론 교육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기업연구소는 “루이지애나의 교육 개혁가들이 수년 동안 못했던 걸 카트리나가 단 하루 만에 해냈다”며 허리케인을 칭찬했다. 이들에게 대홍수는 공립학교 시스템을 민영화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카트리나 이전 123개였던 뉴올리언스 공립학교는 4개로 줄었다. 이 지역의 강력했던 교사노조도 와해되었다.
이렇게 대재앙이 사회에 일어난 후 공공부문에 치밀한 기습공격을 가하는 ‘재난 자본주의’를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 독트린>이란 책에서 고발했다. 거대한 재난이 사회를 대혼란에 빠트리고, 시민들이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자본과 국가는 주도면밀하게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거나 규제완화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킨다. 재난 극복을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졌던 일시적 조치는 이후에도 제도로 흡수되어 영구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쇼크를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IMF체제와 비정규직 제도는 대표적인 사례다.
현 상황도 마찬가지다. 재난 유토피아와 재난 자본주의가 동시에 전개된다. 용기와 협력, 연대의 시민정신이 차별과 배제의 인종주의적 문법에 맞서 싸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보인권을 침해하는 강력한 국가 감시체제가 쉽게 용인된다. 전에도 쉬웠던 해고는 더 쉽게 허용된다. 사회적 공론화를 생략한 비상조치들이 당국의 일방적 결정으로 쉽게 추진되기도 한다. 온라인개학은 대한민국 공교육 시장을 구글, 줌, 네이버 같은 교육플랫폼 기업들에 활짝 열어주었다. 사용자와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프로그램은 개선되고 플랫폼의 상품 가치는 높아지겠지만, 학생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들려 앉아 다국적기업들에 채굴당한다. 이 장면은 재난 이후에도 미래 학교의 ‘뉴 노멀’이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대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달려있다. 재난이 더 큰 재난의 전주곡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사회대협약을 만들어야 한다. 종종 언론은 의료현장에서 코로나19와 싸우는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해준다. 그러나 여전히 쓰고 버리는 일회용 노동자인 그들이 들고 있는 팻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뉴욕의 돌봄 노동자들은 이런 팻말을 들었다. “우리가 죽으면 누가 당신을 돌볼 것인가?” 건물 외벽에는 이런 낙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경찰과 군대보다 간호사가 더 필요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친다. “우리의 생명은 당신의 이윤보다 소중하다.” 나는 그것이 거리에 쓰이고 있는 사회대협약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