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KT 아현지사 화재 청문회, 대책은 없고 정쟁만 있었다

KT 아현지사 화재 청문회, 대책은 없고 정쟁만 있었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9.05.02 09:00

소방청 조사 보고서, 정부 특별점검 결과 분석…전문가들 “제2, 제3의 화재 대비책 마련 시급”

지난해 11월24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에 위치한 KT 아현지사 통신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9시간 만에 진화됐지만 ‘후폭풍’은 컸다. 통신구 화재로 인근 전화나 인터넷 서비스가 먹통이 됐기 때문이다. 한 70대 노인은 119 신고가 지체돼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자영업을 하는 소상공인도 불편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카드 단말기 장애로 밥값을 받지 못하면서 손님을 내보내야 했다. 정보기술(IT) 강국의 자존심이 구겨진 사건이었다.

당시 KT는 화재 발생 사실을 확인하고도 12분이나 늦게 119에 신고했다. 통신구를 관리하는 주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KT의 내부 규정에 따르면, 길이가 500m 이상인 통신구는 과천 관제센터와 혜화지사 통신구팀이 통합적으로 화재를 감시하지만, 500m 미만 통신구의 관리는 해당 지사 경비실에서 맡게 된다.

2018년 11월24일 KT 아현지사 통신구에 화재가 발생해 인근 전화나 인터넷 서비스가 마비되는 등 큰 혼란을 빚었다 ⓒ 연합뉴스
2018년 11월24일 KT 아현지사 통신구에 화재가 발생해 인근 전화나 인터넷 서비스가 마비되는 등 큰 혼란을 빚었다 ⓒ 연합뉴스

화재 확인 12분 후에 119 신고, 왜?

아현지사 통신구는 길이가 500m 미만이다. 아현지사 경비실이 관리 주체지만, 실제로는 KT 가좌지사 CM팀에서 관제하고 있었다. 아연지사 경비실의 경우 외주업체 직원이 단순 건물 경비만 하고 있었다. 화재 신고를 처음 인지한 곳도 KT 자회사인 KT텔레캅이었다. KT텔레캅은 이날 오전 11시에 화재경보 신호를 접수했다. 하지만 실제 119에 신고한 시간은 12분이나 지난 11시12분이었다. 대형 화재를 막기 위한 골든타임인 5분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다. KT의 화재와 통신장애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였던 셈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7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통신재난 방지 및 통신망 안정성 강화대책’을 발표했다. KT 아현지사처럼 ‘관리 사각지대’인 D급 중요 통신시설도 정기점검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소화 시스템 및 감시 CCTV 설치를 개선·권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회 과기정통위 소속 박선숙 바른미래당 의원이 소방청의 ‘화재 조사보고서’와 추가 사고조사 자료, 과기정통부의 ‘2018년 통신재난 관리실태 특별점검 결과보고’ 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있는 D급 통신시설은 모두 835곳이다. 이 중 90.3%인 754곳에 야간 근무자가 없다. 주간에 근무자가 없는 시설도 50.3%(453곳)에 달했다. KT 아현지사 화재는 토요일 오전에 발생했다. 하지만 주말에 근무자가 없는 시설은 86.3%(721곳)에 달했다. KT뿐 아니라 SK텔레콤이나 LG유플러스 등에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해도 대책이 없는 게 사실이다.

재난 전문가들은 소방서 상황실에서 통신시설의 화재 발생을 인지할 수 있는 통합감시시설의 도입 필요성을 지적한다. 하지만 소방서 상황실에서 화재 발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전체 219개 통신구 중 12.3%인 27곳에 불과했다. 나머지 192개 통신구는 119 신고를 통해서만 화재 사실을 알 수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나마 일부 통신구는 설계도대로 시공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KT 공주지사 지하 통신구의 폭은 1.91m, 높이는 2.02m로 표시돼 있다. 하지만 실제 시공은 1.8m에 못 미쳤다. 길이가 1.2km인 세종지사 조치원 통신구의 경우 폭이 1.7m에 불과했다. 박선숙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정부 특별점검 이후 관할 소방서가 이곳을 방문했지만 KT는 대외비라는 이유로 시설 파악조차 못하게 했다. 조치원 통신구의 경우 독성 때문에 인체에 유해할 수 있어 생산 및 판매가 금지된 하론가스 소화기가 40m당 1개씩 25개 설치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4월17일 국회에서 진행된 KT 청문회를 두고 비난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 과기정통위는 올해 1월 KT 아현지사 화재 사고의 원인과 재발 방지를 위한 청문회 개최에 합의했다. 하지만 당초 3월5일에서 4월4일로, 4월17일로 청문회 날짜가 계속 미뤄졌다. 사고 발생 5개월여 만인 4월17일 어렵게 청문회가 열렸지만, 시작부터 잡음이 일었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불출석을 이유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청문회 연기를 요청한 것이다.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은 11시부터 본격적으로 여야 의원들의 질의가 시작됐다.

4월17일 KT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황창규 회장 ⓒ 시사저널 박은숙
4월17일 KT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황창규 회장 ⓒ 시사저널 박은숙

정치 공방으로 번진 KT 화재 청문회

오전 청문회에서 KT가 소방청의 화재 원인 조사를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본사가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화재 원인 조사를 위한 자료 제출은 물론이고, 면담 일정조차 회피한 정황이 포착됐다. 소방청이 공문을 통해 자료 제출을 독촉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이 증인으로 참석한 황창규 회장을 상대로 날 선 질문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후 청문회에서 상황이 급변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야당과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KT 채용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전 원내대표와 황교안 대표가 의혹에 연루된 만큼 자유한국당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면서 ‘KT 화재 상생보상협의체’ 구성 당시 자유한국당이 제외된 배경을 따져 물었다. KT 화재 원인 규명이나 방지 대책은 뒤로한 채 정쟁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소방청이 작성한 화재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KT 화재는 1995년 제작된 환풍기 제어판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사고 현장에는 소화기도 비치돼 있지 않았다. 문제는 25년이나 된 낡은 환풍기 제어판이 현재 다수의 통신구에서 작동 중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KT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한전의 경우 제어판의 내구연한을 15년으로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KT는 내구연한보다 10년이나 더 된 환풍기 제어판을 사용하고 있다”며 “여기에 대한 대응책이 빠져 있는 만큼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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