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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수 공인노무사(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
“얼마 전 일이었어요. 직장에서 성과가 안 나온다면서,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면서, 이럴 거면 그만두든지 하라면서 동료들 모두가 있는 데서 팀장님에게 심한 구박을 받았어요. 너무 모욕을 당한 것 같아 큰 충격을 받긴 했죠. 같은날 동료가 술이나 한잔 마시고 풀자고 했는데, 너무 심란해서 거절하고 근무시간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퇴근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내가 좀 이상해졌어요. 팀장님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어쩌다가 날 부르기라도 하면 숨이 가빠 오기도 하고, 손발이 저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힘들게 하루를 버티다 퇴근하고 나면 내일 다시 출근할 생각에 계속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들기도 힘들고, 힘들게 잠이 들고 나면 몇 번씩 잠에서 깨곤 했습니다. 어렵게 출근을 하고 나면 조그만 일에도 자꾸 긴장이 되고, 조금이라도 큰소리가 나면 덜컥 놀라고 두근거리게 됐어요. 직장에서 앞으로 내가 잘해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져요. 조그만 소란이나 문제에도 혹시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긴장하고 답답해하고 두근거리는 상태가 통제가 안 돼요. 이렇게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이럴 거면 뭐 하러 사나’ 이런 기분도 들어요.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를 찾아가서 진찰을 받았더니 불안장애나 적응장애 같다면서 치료를 위해서는 당분간 직장생활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어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운데, 산재 신청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까요?”
이분이 산재를 신청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알 수 없다. 이분이 얻은 정신질환이 업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은 7명으로 구성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가 경험하기로는 판정의 상당수는 위와 같은 사례에 대해 주요 발병원인이 개인의 정서적 취약성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다. 위 사례와 같은 상황의 스트레스는 여러 사람에게 노출될 수 있고, 여기에 본인의 정서적 취약성(내성적이거나 소심하거나 예민한 성격 등) 탓에 발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 유무를 보통의 평균인이 아닌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법원의 오래된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조개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직장 회식에서 모르고 조개류를 섭취해 입원치료를 요하는 이비인후과 질환이나 피부과 질환을 앓게 됐다면 이것은 분명히 산재에 해당한다. 기침 감기를 앓고 있는 상태에서 외근을 자주했다가 폐렴에 걸린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정서적 취약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별 문제없이 이겨 냈을 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리게 된 경우와 앞서 두 가지 사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필자로서는 잘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사정을 추측해 제언을 하자면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산재에서 인과관계는 사업주 고의·과실 등 사업주의 잘잘못이 있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아프게 된 원인이 업무와 관련 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주가 잘못한 게 있는지’ 혹은 ‘다른 사람들도 사업장에서 흔하게 그런 일을 겪고 있지 않은지’는 인과관계 여부를 밝힐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이미 아픈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왜 건강한 사람처럼 반응하지 못하냐고 묻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취약한 건강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 업무와의 인과관계는 바로 그 ‘취약한 건강조건’에 업무와 관련 있는 요소가 노출됐을 때 발병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발병에 기여한 다른 요인이 발견되지 않는 한 취약한 건강조건 상태에서 특정한 업무 관련 요소에 노출됐을 때 발병가능성이 인정된다면 업무와 질병 간 인과관계가 인정돼야 한다는 얘기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들이 산재 승인 또는 불승인에 관해 버튼을 클릭한 뒤의 풍경은 버튼을 클릭하는 데 들이는 무게보다 상상 그 이상으로 무겁다. 없는 기준을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발 이미 있는 기준이라도 잘 익혀서 판단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