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인권센터
|
조회: 1204회
|
작성:
2014년 12월 11일 12:16 오후
[미 CIA 고문보고서]항문에 음식물 넣는 등 모욕적 고문… ‘인권 미국’에 치명상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입력 : 2014-12-10 22:10:04ㅣ수정 : 2014-12-10 22:36:35
ㆍ‘고문보고서’ 공개 파장… 국제법 위반, 책임자 처벌 목소리 ㆍ“얻은 정보 중 특별한 것 없는데 고문 효과만 과장” ㆍ심문 책임자 정보 지워져 “법적 면죄부 주기” 비판
아프가니스탄 남성 굴 라흐만은 1990년대 내전 때 ‘헤즈비 이슬라미(이슬람당)’라는 무장조직에 들어가 탈레반에 맞서 싸웠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뒤 감옥에 갇혀 있던 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을 ‘구출’해준 일도 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한 뒤인 2002년 10월 테러 용의자로 미 중앙정보국(CIA)에 체포됐고, 카불 시내에 있는 ‘블랙 사이트’, 즉 CIA 비밀 고문시설로 끌려갔다. 아프간인들 사이에선 ‘소금구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수용소였다.
심문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받던 라흐만은 2002년 11월20일 벌거벗겨진 채로 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사망했다. 그가 숨진 방의 기온은 2도였다. 그의 죽음은 7년여가 지난 2010년 4월에야 알려졌다. 그리고 9일 발표된 미 상원 정보위원회 ‘CIA 고문보고서’를 통해 비로소 공식 확인됐다.
보고서에 드러난 고문 실상은 끔찍하다. 일부 수감자들은 뼈가 부러진 채 몇 시간씩 방치됐다. 180시간 동안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당한 이들, 두 팔을 머리 위에 묶인 채 잠 못 자는 형벌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보고서에는 ‘직장(直腸) 급식(rectal feeding)’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강제로 수감자의 항문에 음식물을 밀어넣는 것이다. CIA는 2000년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한 알카에다 요원 압둘라힘 알나시리가 단식농성을 하자 항문에 음식을 넣었다. 한 수감자는 이런 고문 끝에 신체 조직이 찢어지고, 만성 출혈과 직장 탈출 증상을 겪었다.
CIA 심문관들은 이런 짓을 벌인 비밀수용소를 ‘지하감옥’이라 불렀다. 라흐만이 숨진 아프간의 ‘지하감옥’에는 20개의 방이 있었고, 모두 창문이 가려져 있었다. 수감자들은 “완벽한 어둠 속에서, 격리된 감방에 묶여 지냈다. 방에는 배설물을 넣을 양동이 하나뿐이었다”(10일자 영국 가디언 보도). 9·11 테러를 기획했다고 자백한 칼리드 셰이크 모하마드는 이런 시설에서 2003년 11월까지 183차례나 물고문을 당했다.
CIA가 2001년 9·11 사건 이후 해외에서 테러 용의자들을 고문한 실태는 이미 상당 부분 알려졌고, 1970~1980년대에 국내 민주화운동 인사들에게 벌어진 일들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은 내용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21세기에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이다.
상원 정보위는 고문의 도덕적·법적 문제보다 효과와 투명성을 더 문제 삼았다. CIA가 고문으로 얻은 정보들 중에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백악관과 의회, 언론에 효과를 과장했다는 것이다. 고문 프로그램은 CIA가 1989년 의회에 낸 보고서와도 배치된다. 당시 CIA는 고문이 오히려 거짓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어 비생산적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기관이 고문을 자행한 사실이 공식문서에 적시되면 관련자 처벌 요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보위 보고서에는 심문 책임자의 이름 등 관련자 정보가 모두 지워져 있다. 법적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향상된 심문기법’이라는 명목으로 고문을 승인했지만 상세한 내용은 몰랐던 것으로 돼 있어 책임을 면할 가능성이 높다. 법무부는 “유죄 판결을 받아낼 법정 증거가 부족해 기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고문은 미국이 가입한 유엔 고문방지협약에도 위반된다. 유엔은 즉각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벤 에머슨 유엔 대테러·인권 특별보고관은 “어떤 나라도 이런 중대 범죄에 대한 처벌을 면해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대부분 보고서 공개를 비판했지만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미국이 비판하는 적을 닮아서는 안된다”며 공개를 지지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