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게시한 A씨의 이야기를 더 옮기자면, DB금융투자 노조는 매일 조합원 가입과 회사에 대한 노동조합 의견을 담은 이메일을 정오, 점심 즈음 직원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1시가 되기도 전에 노조가 보낸 이메일은 사측에서 삭제한다.
직원의 확인 여부와 무관하게 특정 메일이 삭제되니 A씨는 당황스럽고 불쾌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업무상 목적이라고는 하나 각 개인 직원의 이메일을 회사가 강제로 삭제하는 것은 결국 사찰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타 기업 소속 직장인들은 A씨의 게시글에 “이게 가능한가?”라며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했고 “회사 이메일은 기본적으로 모니터링이 된다”, “정식노조가 설립된 것이 맞나”는 등 여러 의견을 댓글로 달았다.
UPI뉴스는 이 사건을 기사로 다뤘고 이에 관한 사측의 입장도 받았다.
DB금융투자는 노조에서 사내메일을 업무 목적에 맞지 않게 사용해 삭제 조치했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노조는 지난 2018년 사내메일 삭제에 관해 부당노동행위를 들어 고용노동청에 고발했으나 무혐의로 결론 맺어졌다.
DB금융투자 사건 이전에도 회사 메일을 직원의 의사와 무관하게 삭제한 사례는 최근 수년간 여러 업권에서 발생한 바 있다.
태광그룹, KT,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등은 DB금융투자와 같이 노조가 사내 메일을 발송하거나 사내전산망에 글을 게시했다. 그리고 사측은 노조가 발송한 이메일을 차단하거나 삭제했다.
태광그룹의 노조 금속일반노동조합 태광산업지회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를 명목으로 구제신청을 했다.
KT의 근로자들이 모인 단체 KT민주동지회는 지난해 KT 대표이사 등을 대상으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를 들어 검찰에 고소했다.
삼성전자에서 역시 지난해 노조 가입 안내 이메일을 일괄삭제해 노조에서 반발한 사건이 있었고, 올해 11월에도 유사 사건이 생겼다. 삼성전자 노조가 사내메일로 인사개편안을 비판했으나 사측이 발송을 차단한 것이다.
DB금융투자를 포함해 태광그룹, KT, 삼성전자건 모두 사법·행정적으로 사측에 우세한 결과가 나왔다.
태광그룹 노조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부당노동행위 의사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KT민주동지회가 낸 검찰고소건 역시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처분이 됐다.
삼성전자는 단체협약상 허위사실을 유포해 명예훼손 하는 이메일의 삭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노조는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라고 주장하는 상태다.
물론 모두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삼성 디스플레이노조가 올해 회사 사내메일 삭제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삼성디스플레이 노조는 지난 4월 ‘사내전산망으로 조합 활동 관련 메일을 발송하는 행위를 회사가 차단’한 것 등 4가지 문제를 가지고 충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했다.
2개월여 만에 충남지노위는 삼성디스플레이 노조의 손을 일부 들어줬다. 사내전산망의 게시글 삭제나 메일 발송 저지 건이 부당노동행위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겠다. 사내메일을 회사가 삭제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일까요?
앞서 나온 사례가 4건 중 1건만 부당노동으로 인정했으니 ‘아직은 아니다’, 1건이라도 인정사례가 있으니 ‘부당노동행위다’ 등 의견은 분분하리라 본다.
왈가왈부해도 당장 판단할 기준은 모호하다. 이에 대한 ‘명확하고 통용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유사한 해외기준을 보면, 영국 정보위원회(ICO, Information Commissioner’s Office)에서는 업무용 이메일을 개인 데이터로 본다.
이름, 회사 이메일 주소는 특정 개인과 명확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개인 데이터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 데이터를 회사의 마음대로 삭제할 수 없다는 것이 영국 국가기관의 견해다.
국내에는 이런 명확한 기준이 없다. 앞으로 여러 문제 제기를 거치면서 영국 정보위와 같이 이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한 가지 이번 사건에는 그냥 흘려 보내기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DB금융투자에서 사내메일 삭제에 관해 노조도 아닌 일반 직원이 ‘일방적이고 불쾌하다’는 감정을 보인 부분이다.
과거라면 전통적인 사고관이 깊이 개입된 대기업, 금융기업에서 직원이 회사의 방침에 반발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익명의 커뮤니티이긴 해도 A씨는 불쾌감을 표현했다. ‘회사가 뭔데 나의 메일을 함부로 들여다보고(사찰) 마음대로 삭제하냐’는 시각이다.
대기업이든 나에게 급여를 주는 기업이든 ‘내 권한은 침범하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는 관점이 금융회사에서 나왔다. 지배적 힘을 가진 이가 무조건적인 수용을 요구하는 시대가 끝나가는 한 장면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