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프랑코를 이겼듯이 촛불이 적폐세력을 이길 수 있을까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3) 마드리드와 ‘쓰러진 자의 계곡’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가 화해라는 이름하에 스페인판 삼청교육대로 만든 쓰러진 자의 계곡, 최근 과거청산으로 여기 묻혔던 프랑코의 시신이 파헤쳐져 이장됐다.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가 화해라는 이름하에 스페인판 삼청교육대로 만든 쓰러진 자의 계곡, 최근 과거청산으로 여기 묻혔던 프랑코의 시신이 파헤쳐져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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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는 가슴속에 스페인을 간직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람도 패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용기가 보상받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 바로 거기(스페인 내전)였다.(카뮈)

나는 나의 그림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고, 침략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표면 전체에 면도날들이 있어서 그들이 손을 베지 않고는 내 작품에 손을 대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피카소)

“나의 그림들이 자신을 방어하고 침략자들에 저항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전을 통해 스페인을 독재체제로 바꾸고 학살을 벌인 프랑코에 맞서
피카소는 ‘게르니카’ 등으로 그를 비판해 40년 동안 사실상 망명생활
스페인은 과거청산으로 결국 프랑코에 저항한 피카소의 손을 들어줘

‘1808년 5월3일’.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군의 학살을 그린 고야의 불후의 명작 제목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서 이 작품이 걸려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스페인 학생들이 열심히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120년 전 이곳에서 이 그림을 보며 공부하던 피카소를 보는 것 같았다. 사실 고야의 그림이 피카소가 ‘게르니카’와 ‘한국의 학살’을 그리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고야로부터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을 대표하는 세계적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아버지는 피카소를 마드리드로 유학 보내 스페인 제1의 미술학교인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피카소는 천편일률적이고 도식적인 수업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나면 이 미술관에 와서 고야의 그림을 비롯한 명작을 보고 공부를 했다. 이곳이 그의 최고의 학교였던 것이다.

마드리드에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미술관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스페인을 대표하는 바로 이 프라도미술관이다. 다른 하나는 소피아미술관이다. 소피아미술관은 ‘게르니카’가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오자 ‘게르니카’가 걸려 있던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모델로 해서 만든 ‘현대미술관’으로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 현대화가들 작품이 전시돼 있다. 이 중 달리는 프랑코를 “스페인 최고의 영웅”이라고 찬양하고 “강력한 지도자에 의한 일인 지배가 최상의 체제”라고 주장한 ‘피카소의 적’이었다.

역사적인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시돼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엄청나게 긴 줄을 통과해 간신히 소피아미술관으로 들어가 ‘게르니카’를 찾아 나섰다. 역시 원본 ‘게르니카’는 나를 압도했다. 그 명성답게 이 방만은 관람객이 가득 찼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긴 나무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역사상 그 어느 미술작품보다도 영향력이 크고 예술의 힘을 보여준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모나리자’도 ‘게르니카’ 같은 영향력은 전혀 갖지 못했다. ‘게르니카’의 각 부분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피카소는 “황소가 진혹성을, 말은 민중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소피아미술관은 그림 촬영을 허용하지만, 이 그림만은 금지하고 있고 경비도 삼엄했다. 워낙 논쟁적인 그림인 데다 이미 낙서테러를 당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르니카’를 보고 있자니 문득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서 본 한 포스터가 생각났다. ‘망명 중인 피카소’라는 포스터였다. 피카소는 53세이던 1934년 마지막으로 스페인 땅을 밟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고 프랑코가 승리해 스페인이 독재체제로 변화하면서 그는 1973년 숨을 거둘 때까지 40년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실상 망명생활을 한 것이다. 특히 프랑코군의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를 그리고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 등의 그림을 통해 프랑코를 희화화하고 비판하면서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피카소도 “프랑코가 살아있는 한,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의 특별전시회에 걸린 많은 피카소 사진 중 유독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던 곳이자 그가 묻힌, 남프랑스 보브나르그성의 커다란 거실 소파에 외롭게 홀로 앉아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에는 20세기 최고 미술가라는 명성과 남부럽지 않은 부를 얻었지만, 나이 들어 그리운 고국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고국은 독재 속에 신음하고 있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천재화가의 고독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느꼈을 고독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피키소와 망명: 저항하는 스페인 예술의 역사’라는 학술회의의 포스터. ‘게르니카’이후 피카소는 저항하는 참여예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피키소와 망명: 저항하는 스페인 예술의 역사’라는 학술회의의 포스터. ‘게르니카’이후 피카소는 저항하는 참여예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피카소와 프랑코. 둘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던 스페인의 ‘두 거인’이었다. 결국 피카소는 프랑코가 없는 조국, 민주화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피카소보다 11년 뒤인 1892년 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사를 나온 뒤 스페인과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모로코 분쟁 진압에 공을 세워 33세에 유럽에서 제일 어린 장군이 됐다. 1931년 스페인은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국이 됐고 1936년 선거에서 승리해 좌파정부가 들어섰다. 이에 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좌파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왕정을 지지하는 왕정주의자에 극보수주의자였던 그를 모로코로 귀양 보냈는데,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히틀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수송기를 보내 프랑코부대를 스페인으로 공수해줬다. 마침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들이 탄 비행기가 떨어져 다 죽고 말았고, 프랑코는 왕당파의 유일 지도자가 됐다. 그는 게르니카 학살 등 히틀러의 도움으로 3년간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공화파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통해 스페인을 철권통치의 파시스트 국가로 변모시켰다.

그는 평생을 총통으로 살면서 스페인을 무려 36년간 지배하고 1975년 눈을 감았다. 박정희가 유신을 통해 따라하고 싶었던 모델이 바로 프랑코와 대만의 장제스였을 것이다. 프랑코는 그가 행한 많은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고 피카소보다 2년이나 더 살았고, 자신이 만든 ‘쓰러진 자의 계곡’ 성당 제단에 묻혔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본인이 만들어 놓은 파시스트체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준비까지 해놓았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1931년 공화정이 들어서며 쫓겨난 스페인 마지막 왕 알폰소 8세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를 일찍이 점찍어 그를 사관학교에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교육시킨 후 죽었다. 그러나 역사의 복수라고나 할까. 카를로스는 왕에 오르자마자 민주화로 나아갔다. 1981년 민주화에 불만을 가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장악하고 다른 군부의 봉기를 촉구했을 때도, 카를로스는 방송에 나와 쿠데타를 비판하고 애국적인 군인들에게 민주주의 수호를 촉구했다. 10·26과 12·12, 1980년 봄으로 이어진 결정적 시기에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최규하와 같은 지도자를 가졌던 우리와 달리 결정적인 시기에 용기 있는 왕을 가졌던 스페인은 복 받은 민족이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민주화는 가속화했다.

‘게르니카’의 원조인 고야의 걸작 ‘1808년 5월 3일’,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군의 학살을 고발한 작품으로 피카소에게 영감을 줬다.

‘게르니카’의 원조인 고야의 걸작 ‘1808년 5월 3일’,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군의 학살을 고발한 작품으로 피카소에게 영감을 줬다.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가면, 도로표지판에 ‘쓰러진 자의 계곡’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나타난다. 고속도로에 내려 ‘쓰러진 자의 계곡’을 향해 올라가면 언덕 위 산꼭대기에 높이 150m인 엄청난 크기의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큰 바위 성당이 나타난다. 바위산을 파서 만든 이 성당은 사실상 바티칸성당보다도 큰 세계 최대이다. 바티칸은 바티칸성당보다 긴 회랑을 가진 성당을 금지하고 있어 바티칸보다 짧게 지었지만, 제단을 포함하면 길이가 260m로 세계에서 제일 긴 성당이라고 한다. 둘 다 프랑코가 내전에서 승리한 뒤 ‘화해의 상징’으로 지은 것이다. 이곳에는 ‘쓰러진 자의 계곡’이라는 이름처럼 스페인 내전에서 쓰러진 양쪽의 시신들이 묻혀 있다.

그 같은 이유로 1980년대 말 한국의 저명한 민주언론인이 이곳을 다녀간 뒤 5·18민주화운동의 화해 의미로 광주 무등산에 ‘쓰러진 자의 계곡’ 같은 커다란 십자가를 설치하자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쓰러진 자의 계곡’은, 이 언론인이 생각한 것처럼 화해의 십자가나 화해의 성당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극우전승비’이다. 프랑코는 포로가 된 공화군들에게 감옥형을 선고하고 이들을 강제동원해 성당과 십자가 등을 건설했다. 한마디로 ‘스페인판 삼청교육대’였다. 프랑코는 이곳에 화해의 상징으로 양쪽 희생자 3만3833명을 묻었지만 공화군 쪽은 숫자를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학살한 피해자들도 제멋대로 묻어서 유가족들이 시신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화해의 상징이라는 십자가와 성당은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된 수많은 민주투사들의 피와 눈물을 쌓아 놓은 ‘피눈물의 응고체’와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프랑코는 죽은 뒤 성당 제단 바로 옆에 묻혀 모두 그를 향해 기도하도록 만들었다.

27년 전인 1992년, 나는 5·18기념사업에 필요한 자료수집을 위해 5·18 유가족 등 관계자들과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스페인의 과거청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을 만났다.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과거청산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스페인도 이제 역사 청산작업을 벌이고 있다. 집권 사회당 정부는 독재자 프랑코가 ‘쓰러진 자의 계곡’에 묻혀 있을 자격이 없다며, 그의 묘지 이장을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을 주도한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이번 결정으로 공적인 장소에 독재자를 찬양하는 도덕적 모욕에 종말을 고하게 됐다”고 말했다. 프랑코 후손들이 법원에 이의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도 이장을 명령했다. 스페인의 비극이 있은 지 80년 만에, 피카소가 죽은 지 근 반세기 만에, 스페인판 ‘역사 바로 세우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이곳을 다녀온 뒤인 2019년 10월25일 프랑코의 시신은 파내져 가족묘지로 옮겨졌다.

스페인의 독재자로 스페인 내전으로 1930년대 이후 피카소와 반목했던 프랑코.  wikicommons 자료

스페인의 독재자로 스페인 내전으로 1930년대 이후 피카소와 반목했던 프랑코. wikicommons 자료

과거청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게르니카 학살 80주년이 되는 2017년 게르니카 공습을 주도했고 이후에도 프랑코군을 도와 일등공신 역할을 한 독일 콘도르비행단 조종사들의 마드리드 무덤에서 그들의 공로를 치하한 비석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 역시 프랑코가 이장된 다음날 제거됐다. 그런 만큼 ‘쓰러진 자의 계곡’ 성당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27년 전과 달리 가볍기만 했다. 긴 회랑을 걸어 들어가자 역사 바로 세우기 때문인지 성당 안 분위기가 27년 전과 매우 달랐다. 제단 앞 프랑코의 무덤 앞에 서서 피카소를 생각했다.

결국 프랑코와 피카소 가운데 ‘역사의 승자’는 피카소였다.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해 평생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가 갔지만, 이제 역사적 재평가 속에 그의 무덤까지 파헤쳐 이장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피카소는 긴 망명생활을 하고 타지에서 숨을 거둬야 했지만, 그의 ‘알제리의 여인’은 2015년 판매 당시로는 경매사상 최고가인 1억7900만달러에 팔렸고, 20세기 최고의 미술가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프랑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피카소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프랑코, 결국 당신이 졌고 피카소가 이겼습니다. 파블로, 이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공화파 동지들과 함께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스페인 내전에는 스페인 민주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56개국에서 달려온 4만명의 투사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 결과 내전 중 약 35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2년간 프랑코 정부의 백색테러에 의해 20만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기도를 마치자, 이들 희생자, 특히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 각지에서 달려왔다가 목숨을 잃은 수많은 젊은이들 얼굴이 눈앞에 스쳐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피카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예술가들은, 감옥에 있더라도, 강제수용소에 있더라도, 부서트릴 수 없다. 비록 내가 내 감방의 먼지투성이 마루에서 내 혀와 침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내 자신의 예술세계에서는 전능할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2071642005&code=960100#csidxbc4796e914c2807965c5133490e63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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