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이면
작성자: 조합원 | 조회: 83회 | 작성: 2016년 11월 21일 12:57 오후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이면
-노동자들에게 강요된 희생과
젊은이들의 피 값
이승원┃노동자역사 한내
십 수 년 전 한국 청소년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박정희를 꼽은 시절이 있었다. 이유는, 독재는 했지만 경제성장을 이룬 치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민주화를 외치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은 물론이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경제성장에는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 젊은 군인들의 피의 대가, 고향을 버리고 뜨거운 사막의 땅에 가서 피땀 흘린 노동자들의 고귀한 노력이 녹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성장의 이면에 눈을 돌려야 한다.
민족문제 덮어주고 경제개발 자금 확보
박정희가 내세운 통치 기조는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억압적 장치를 마련하고 저항의 여지가 있는 정당사회단체의 손발을 묶으면서 기반을 확보해나갔다. 문제는 경제정책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경제3개년 계획을 수정하여 만든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수립요강(1961년 4월)’을 차용해 자신의 경제개발계획인 것처럼 내세웠지만 실천적인 부분에서는 대안이 없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한일수교를 맺었다. 학생과 지식인들이 거세게 반대했지만 박정희는 그들의 저항을 군대를 동원해 억압하고 1965년 한일수교협정을 체결한다. 1951년 10월 처음으로 테이블이 만들어진 이후 14년 간 끌어온 협정은 단 10분 만에 체결됐다. 박정희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일본은 한참 달아오른 진무경기(진무천황 이후 최고였던 한국전쟁 직후 일본의 경기 호황기를 표현하는 말)를 이어갈 시장이 필요했다. 이 둘을 연결함으로써 미국은 소련과 중국에 대항하는 블록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한일수교협정의 조건으로 박정희정부는 유상차관 2억 달러, 무상차관 3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받았다. 그 당시 6억 달러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었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18억 달러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로 고통 받은 자들은 민중이다. 이를 ‘합법화’ 해주며 받은 돈은 경제개발의 미명아래 재벌을 키우는 특혜금융으로 활용됐다. 그리고 정부는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값싼 노동력 기업에 무한 제공…해외에도 팔고 전쟁에도 팔고
이제 남은 것은 노동력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호주, 일본에서 수입한 밀가루는 21만 5천 톤 규모였다. 쌀값은 떨어지고 농촌경제가 피폐화되어 농촌 인력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모여들었다. 60년대 중반 서울은 자고 나면 옆집이 생겼고 수도, 교통, 전염병 등 도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도시로 와 빈민이 된 이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자본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저항할 꿈도 꾸지 못했다. 한국노총을 내세워 노동자를 통제하고,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을 마치 미덕인 것처럼 포장하고, 도시새마을운동으로 근면을 강조하고, 새마을노래 보급으로 사상적 세뇌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노동자는 자신의 피를 짜내며 박정희식 경제개발에 동원됐다.
최근 특정 방송은 북한의 외화벌이를 조소하며 비웃고 있지만 60~70년대 남한의 자화상이다. 정부의 노동력 송출 정책은 1963년 서독에 광부 1,500명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독일은 광부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이어 1966년 간호사를 모집해 독일로 보냈다. 이들은 청소를 하고 시체를 닦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60~70년대 독일로 간 광부는 8천여 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만1천여 명 규모였고 이들이 번 외화는 국내 총생산의 무려 2%에 달하는 규모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63년 발생한 베트남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자, 박정희는 파병을 자청한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까지 4만7,872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한국군을 현대화하고 일부 군수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기로 약속했고,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과 한국 상품의 수출을 지원했다. 살아오지 못한 자가 5천 명이 넘고 부상자도 1만6천 명이 넘는다. 박정희 정권의 2차 경제개발은 전쟁에 참여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흘린 피 값으로 이뤄진 것이다.
국가경제가 정당한 방법으로 발전했어야 구성원들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사회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박근혜의 창조경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것처럼 박정희도 경제정책의 내막을 들어다보면 ‘경제 성장을 이룬 대통령’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도 최악의 전쟁으로 꼽히는 베트남 전쟁. 박정희는 자진해서 파병을 제안해 젊은 피를 바쳤다. [출처 : <노동자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