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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6일 10:46 오후
우리 이데올로기, 경제 인종주의
등록 : 2014.11.25 18:55수정 : 2014.11.25 18:55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남’(미국 재벌들의 해외 하도급 기업의 저임금 노동자나 이민자)을 과도하게 착취해 수익성 회복에 나선 미국과 달리, 한국 신자유주의는 자국민 임금 근로자 절반 이상을 현대판 천민으로 강등시켜 집중 착취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에서 종족적 인종주의와의 투쟁에서 흑인·백인 운동가들이 연대했듯이, 한국의 경제 인종주의와의 투쟁을 비정규직·정규직들은 다 같이 해야 마땅하다. 설령 본인이 정규직이라 해도 그 자녀가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은 게 오늘날 한국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나는 지난 열흘 동안 특강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돌았다. 미국의 현실을 보면서 늘 떠올랐던 것은 한국의 현실이었다. 돌이켜보면 두 나라의 관계는 가히 숙명적이라 하겠다.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본산이라면,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모범사회다. 어떤 면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사회다. 예컨대 인문학 경시 풍조는 한·미 양쪽 대학의 공통점이지만 ‘비인기 학과’를 아예 없애도 되는 한국의 기업형 대학들에 비해서는, 미국 대학들의 인문학 고사 정책은 점진적이다. 한국 대학들의 ‘과감한 시장주의’를 선망하는 미국 대학 당국자들도 똑같이 하고 싶어하지만, 학생·교원들의 저항이 훨씬 거세기에 그리 손쉽게 인문학 말살정책을 쓰지 못한다. 그만큼 미국에서 저항의 중심으로서의 대학의 구실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강도가 더 높기 때문이기도 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약 35년의 역사를 가진다. 1970년대에 두드러진 기업 수익성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단기 이윤의 최대화를 뼈대로 한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사실상 동결 내지 인하당하고, 외국의 저임금지대에 맡길 수 있는 모든 생산을 다 국외로 빼돌리는 것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반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불과 약 17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미국 이상으로 신자유주의화를 감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속도가 빠르고 정책의 강도가 매우 높았다는 뜻이다. 그게 어떤 의미인가?
금융자본·기술생산의 중심인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제조업 국가다. 그만큼 미국과 달리 저임금지대로의 생산 이전은 한국으로서 쉽지 않다. 한국의 국내총생산 가운데 제조업 비중은 1980년대 말 이후로 계속해 약 30~31%였으며, 이 수치는 줄어들지 않았다. 반대로 지속적인 생산 이전의 결과로 미국 제조업의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또 한국과 달리 역사적으로 이민자들의 나라로 성장해온 미국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에 대한 초착취를 통해 이윤율을 부분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거의 노예 신세에 가까운 약 1100만명의 ‘불법 체류자’를 비롯하여 미국의 총인구에서 1세 이민자들은 거의 15%를 차지하는데, 이는 대다수의 유럽국가와 견줘도 높은 수준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아무리 외국인의 수가 늘어난다 해도, 아직도 외국계 인구의 비율은 2.9% 정도다. 그렇다면, 미국만큼 외국인 착취도 공장 이전도 하지 못한 한국 정부·자본의 ‘미국보다 더 강한 신자유주의 조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 흔히 ‘비정규직 양산’으로 알려진 이중 노동시장을 만든 것이야말로 미국 등 세계체제 핵심부와 또 다른 준주변부 국가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도입의 핵심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고용 형태의 차이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기업사회다. 기업·직장을 떠나서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료·교육 등 본인의 생존과 자녀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도 무료가 아니며, 또 실업수당부터 국민연금 내지 기초생활수당까지의 각종 사회적 임금들은 그 지급 기간이 짧거나 조건이 까다롭거나 생활이 불가능한 작은 액수다. 결국 (정규직) 직장이 없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전체 근로인구의 절반 이상이 되는 비정규직층의 양산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조처는 단순히 고용시장의 악화는 아니었다. 새로운 현대판 천민계급을 만들어 그 천민들에 대한 초착취를 통해 이윤 위기의 타파를 시도한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남’(미국 재벌들의 해외 하도급 기업의 저임금 노동자나 이민자)을 과도하게 착취함으로써 수익성 회복에 나선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자국민 임금 근로자 절반 이상을 현대판 천민으로 강등시켜 집중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뜻했다. 경제식민지 확보가 미국에 비해 훨씬 더 어려운 한국의 자본은, 결국 자국민의 상당 부분을 식민화한 것이다. 이 자국민의 식민화 과정은 우리 일상 속의 통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미국에 가서 느낀 점은, 아무리 형식상으로 인종차별이 1960년대의 투쟁으로 철폐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미국 사회가 여전히 인종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백인이 다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권층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백인이다.
<포천>지가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중에서 흑인과 아시아인, 라틴(중남미)계는 합해서 4%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나머지 96%의 미국 경제계 지배자들은 백인이다. 미국 전체 인구 중에서 백인은 62% 정도만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앵글로색슨 계통의 백인들이 여전히 지배층의 뼈대를 이루는가 하면, 내가 여행한 캘리포니아의 일상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대부분의 서비스노동자들은 전부 라틴계다. 심지어 엘에이의 코리아타운에 가도, 한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나 가게에서 서비스노동을 도맡아 임금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대개 라틴계다. 철저하게 종족계급(ethnoclass)별로 서열화돼 있는 미국 사회에서 예컨대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 출신들은 대개 기술자와 중소기업인의 중간계층에 해당된다. 얼핏 보면 ‘성공한 마이너리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수위 이상으로는 집단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성장하기가 힘들다. 노골적 인종차별은 퇴조를 보여도, 인종적 경계선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 강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한국인들을 천민화시켜 착취하는 한국은 어떤가? 우리 상전국가의 고질적인 인종주의에 상응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철저한 경제 인종주의다. 한국은 혈통주의 사회인데도, 혈통주의는 그 사회적 차별의 구도를 전혀 결정짓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서 만난 비한국인 노동자들 중에 한국에서의 차별과 폭력에 가장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오히려 바로 ‘같은 혈통’인 중국 조선족과 탈북자들이었다. 타자든 자국민이든 한국에서의 차별구도는 명확히 경제본위다. 물론 호남인에 대한 지역차별이라든가 지방대 내지 고졸 출신에 대한 학력차별 등 지연·학연에 따른 차별의 구조는 옛날부터 상당히 복잡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신흥 천민계급의 출현에 따라 이 모든 차별관계들은 주변화되고, 비정규직에 대한 살인적 차별은 차별구도 전체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리고 이 차별의 심도는 미국에서의 인종주의보다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지 않는다.
몇 주일 전에 서울 압구정동의 한 부촌 아파트에서 음식물 던지기 등 주민으로부터 “동물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잔심부름과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분신자살한 이만수 열사를 기억하는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 25만명의 경비노동자들이 당해야 하는 차별은, 1960년대 이전의 미국에서 흑인들이 감수해야 했던 일상적인 모욕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모범적 신자유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의 경제 인종주의는 오늘날 미국의 종족적 인종주의를 오히려 능가할 수준이다. 그 피해자는 경비노동자뿐인가? 대개 비정규직인 은행·증권·생명·손해보험회사 등 금융권 직원 중에서 고객응대 업무 담당자의 66%나 고객의 폭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최근 발표된 조사 결과다. 노인이나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괴롭히는 것은 한국에서 현대판 양민이라고 할 ‘시민’, 즉 중산층의 대중적인 ‘기분풀이’가 된 셈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미국에서 종족적 인종주의와의 투쟁에서 흑인·백인 운동가들이 연대했듯이, 한국의 경제 인종주의와의 투쟁을 비정규직·정규직들은 다 같이 해야 마땅하다. 백인이라고 경제적 몰락을 언제까지나 막을 수 없듯이, 영구적인 정규직도 없다. 설령 본인이 평생 정규직이라 해도 그 자녀가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은 게 오늘날 한국이다. 우리가 과연 경비노동자에게 반말을 해대고 음식을 던지는, 불안 노동자에게 분신 이외의 저항수단이 없어진 사회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인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