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관의 사기업 노조활동 불법개입 및 민간인 사찰···내용은 가리고 제목만 공개
1·2심 “공개 거부할 이익 없어”···청구인 “국가기관의 노동자 인권침해, 시간지연 안 돼”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KT 노조의 민노총 탈퇴 추진 관련 활동 내용'이라는 제목의 문서. 내용이 삭제된 상태(붉은색 박스)로 공개됐다.  / 사진=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제공.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KT 노조의 민노총 탈퇴 추진 관련 활동 내용’이라는 제목의 문서. 내용이 삭제된 상태(붉은색 박스)로 공개됐다.  / 사진=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제공.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이명박(MB) 정부 시절 정보기관이 사기업 노동조합 선거에 개입하고, 민간인을 사찰하며 작성한 문건의 공개 여부를 다투는 행정소송이 대법원 판단을 받게 됐다.

일각에선 정보공개가 정당하다는 1·2심 법원 판결에도 국정원이 시간 끌기를 위한 형식적인 상고를 제기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정원은 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이 제기한 정보공개 소송에서 패소한 데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다.

조 위원장은 2020년 11월과 2021년 6월 국정원에 자신에 대한 사찰 및 KT노조의 민주노총 탈퇴 관련 등 자료를 공개하라고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국정원은 대부분의 내용을 비공개 상태로 조 위원장에게 부분 공개했고, 조 위원장은 문건 전체를 공개하라며 이번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조 위원장이 정보공개를 청구한 문건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국정원이 생산한 ‘KT노조 위원장 선거 관련 동향 및 전망’, ‘조태욱 KT 노조위원장 출마 예상자 동향 및 OO의 대응 동향’, ‘KT노조위원장 선거 판세 분석 및 전망’, ‘온건후보 KT노조위원장 당선을 위한 당원 지원활동 실태’, ‘KT 노조의 민노총 탈퇴 추진 관련 활동 내용’ 등 14개 문건 중 ‘비닉’(庇匿, 덮어서 감추는 것)처리된 부분이다.

법원의 비공개심리에 따르면, 국정원이 작성한 문건에는 ▲KT노조 위원장 선거 당시 원고(조 위원장)를 포함한 후보자들, 후보자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 KT노조의 민주노총 탈퇴와 관련해 당시 KT노조 위원장을 설득하는 등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의 각 이름, 직함들이 포함돼 있다. 또 ▲KT노조의 위원장 선거 당시 국정원이 파악한 동향과 KT노조의 민주노총 탈퇴 추진활동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1·2심 법원 모두 국정원에게 청구 문건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국가정보원은 국가기관일 뿐 사적으로 사업 활동을 영위하는 사업자가 아니”라면서 “이 사건 각 정보는 국가정보원이 KT노조 위원장 선거 당시 전체적인 전황과 원고를 포함한 출마후보자들의 동향을 파악해 그에 대한 전망과 대책을 수립하면서 작성한 자료로서 (국정원의) 경영·영업상 비밀에 관한 사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단했다.

개인정보가 포함돼 사생활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는 국정원의 주장에 대해서도 1심은 “청구인이 개인정보를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요구해 (사생활 정보는) 공개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면서 “그 외 부분은 KT노조의 위원장 선거 당시 파악한 동향과 KT노조의 민주노총 탈퇴 추진활동에 관한 내용으로, 그 공개로 인해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1심은 “국가기관의 노조활동에 관한 불법개입 내지 민간인 사찰과 관련한 정보에 공개를 거부할 정당한 이익이 없다”라고 꼬집었다.

국정원은 항소심에서 비공개 정보만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정보와 결합할 경우 개인을 특정할 수 있다며 비공개 결정이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달 13일 2심 재판부 역시 “KT노조 위원장 선거는 노조원의 자유로운 의사형성과정으로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건전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공명정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점에 비춰볼 때, 이 사건 정보 중 ‘개인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대상이 된 정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검토해, 어느 부분이 어떠한 법익 또는 기본권과 충돌돼 비공개 사유에 해당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주장·증명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피고(국정원)이 주장하는 사유만을 들어 공개를 거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더 나아가 살필 이유도 또한 없다”라고 국정원의 항소를 기각했다.

국정원은 지난 1일 상고했다.

조 위원장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가정보기관이 이렇게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하고 그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자꾸 지연시키는 것은 (국가기관의) 도리가 아니다”면서 “(비공개 문건에) 국정원이 KT 민주노조 파괴를 위해 개입한 핵심적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조 위원장은 2009년 국정원이 사측과 공모해 노조선거 등에 개입했다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가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해고됐다. 관련 형사사건에서 그는 유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뒤늦게 확보된 국정원 문건을 통해 국가기관의 노조 선거 개입 및 노조파괴 활동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또 사측이 이에 공모했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정황이 담긴 내용 역시 확보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조 위원장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1심에서 일부 승소)을 진행 중이며, 명예훼손 형사사건 재재심(재심은 증거불충분으로 기각)을 준비 중이다. 조 위원장은 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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