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노조파괴’ 공작에 대해 법원이 4년여 만에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법원은 정부가 피해 노조에 2억6천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정부의 노조파괴와 관련해 민사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재판장 정찬우 부장판사)는 8일 민주노총과 전교조·공무원노조·금속노조·서울교통공사노조와 피해자 1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4년6개월 만의 1심 결론이다.
‘국정원 노조파괴’ 드러나자 노조 소송
법원은 국가가 각 노조에 2억6천만원(민주노총 1억원·전교조 7천만원·공무원노조 5천만원·금속노조 3천만원·서울교통공사노조 1천만원)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아울러 KT노조 활동 당시 해고된 조태욱씨에게 국가가 위자료 100만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조씨는 2009년 국가정보원의 공작으로 KT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해고됐다.
재판부는 “공무원들이 노조가입과 탈퇴를 종용하고 언론을 이용해 노조를 비방한 행위는 노조의 단결권을 비롯한 제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서 국가는 노조에 입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소멸시효 항변을 주장한 정부측 주장도 배척했다.
이번 소송은 노동계가 2018년 6월 이명박 정부의 노조파괴 공작에 책임을 물으며 2억6천600만원을 청구하는 내용의 소송을 내면서 시작됐다. 당시 국정원 내부감찰 결과 국정원이 KT노조와 서울지하철노조를 민주노총에서 탈퇴시키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정원이 노조파괴 공작으로 악명을 떨친 ‘창조컨설팅’과 협력한 의혹도 제기됐다. 창조컨설팅은 2011년께 유성기업과 공모해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썼다. 당시 여러 기업에 “국정원 등 유관기관과의 원활한 협력체제를 강화한다”고 홍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지하철노조 등 100개 노조에서 탈퇴한 3만여명이 참여한 ‘국민노총’ 설립에도 관여해 ‘건전 노총 설립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1억5천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노조파괴 피해자들 “노동 3권 무력화”
노조들은 재판에서 국가기관이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무력화했다고 주장했다. 노조측은 “국가기관이 나서서 노동자의 자주적인 단결체인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한 것은 헌법적으로 도저히 정당화되기 어려운 불법행위”라고 비판했다. 국정원이 민주노총을 국가의 ‘주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정원이 ‘민주노총 무력화’ 계획을 세운 뒤 △하부조직 탈퇴 유도 △선거·총회 결의 과정 개입 △노조활동 사찰·방해 △신규노조 설립 방해 등 불법행위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전교조’ 역시 국가가 보수단체에 2억여원의 금전적 대가를 주면서 전교조 비난 집회 개최를 교사했다고 지적했다. 국정원이 ‘전교조 자체의 불법단체화’ 목표 아래 법외노조 통보 처분을 위한 1차 시정명령에 개입하는 등 지속해서 사찰한 사실도 제시했다.
‘공무원노조’에 대해서도 노조측은 국정원이 민주노총 가입 관련 총회 결의 과정에 개입하고, 주요 간부를 징계해 손배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공무원노조 전신인 통합공무원노조 초대 위원장에 선출됐던 양성윤 전 위원장은 2009년 11월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임된 바 있다. 양 전 위원장은 지난해 8월 복직했다. 노조측은 서울교통공사노조 또한 ‘노조파괴’ 공작으로 민주노총을 탈퇴하게 된 대표적 사업장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 화물연대 탄압, MB정부 판박이”
법조계는 법원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노조를 대리한 하태승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MB정부의 노조파괴 공작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라며 “사건의 진실과 국가 책임이 법원에서 인정됐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판결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문제 대응에 시사점이 크다는 견해가 나온다. 하 변호사는 “국가는 노조의 단결권 보호 의무를 부담하는데 최근 화물연대 파업 국면에서 윤석열 정부가 공권력을 총동원해 노조를 탄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MB정부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MB정부 시절 국가기관이 협업해 노조활동을 무력화한 모습이 화물연대 파업 국면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계도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현 정부를 비판했다. 금속노조는 이날 논평을 내고 “윤석열 정부가 이병박 정부의 노조파괴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며 “법원이 ‘국가는 가해자고 범죄자’라고 선고하는 참담한 현실을 이제는 제발 ‘손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MB정부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도 “오늘은 국가가 노조파괴 배후에 있다고 외쳤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한 날”이라면서도 “노조파괴 범죄를 저질렀던 국가가 화물연대 노동자들에게 범죄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