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연령을 이유로 정년을 앞둔 직원에게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로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으로 유사한 소송의 하급심 선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적 높은데도 55세 이상 임금 삭감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6일 한국전자기술연구원(옛 전자부품연구원) 퇴직자 A(67)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등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회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연구원은 공공연구노조 전자부품연구원지부와 합의해 2009년 1월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승진·승급 방식을 변경하고 성과연급제를 도입해 명예퇴직제를 시행했다. 61세 정년은 유지하되 만 55세 이상 직원에게 이전 직급·역량등급과 무관하게 다른 역량등급을 일괄 적용해 급여를 지급했다.
경영혁신과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만 55세 이상인 선임(1~21등급)의 경우 2009년부터 14등급을, 책임(1~23등급)은 2등급을 적용해 기준급이 지급됐다. 1991년 입사한 A씨는 2011년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았다. 월급이 93만~283만원 감액됐다.
특히 55세 이상 직원들이 51~55세의 실적 달성률보다 높았는데도 반대로 이들의 임금만 감액됐다. 그러자 A씨는 명예퇴직하면서 임금피크제가 옛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며 2014년 9월 소송을 냈다. 그는 임금피크제로 인해 직급이 2단계, 역량등급이 49단계 강등됐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강행규정 고령자고용법 위반”
재판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임금·복리후생·교육·배치·퇴직 등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정한 고령자고용법(4조의4 1항)이 강행규정인지와 임금피크제가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차별에 해당하는지가 다퉈졌다.
대법원은 고령자고용법 조항이 ‘강행규정’에 해당한다고 봤다. 그 근거로 연령차별을 당하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고,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사업주에게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점을 들었다. 대법원은 “규정의 내용과 헌법상 평등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려는 고령자고용법상 차별 금지 조항의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강행규정에 해당한다”며 “따라서 이에 반하는 단체협약·취업규칙·근로계약은 무효”라고 명시했다.
이를 전제로 임금 차별에 대한 판단 기준도 제시했다. 대법원은 “고령자고용법이 말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경우는 연령에 따라 근로자를 다르게 처우할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거나 달리 처우하는 때에도 방법·정도 등이 적정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무효 여부는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노동자들이 입는 불이익 정도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기준을 세웠다.
“업무 내용·목표 수준, 차이 없어”
A씨 사건도 임금 차별에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55세 이상 직원이 높은 실적 달성률을 보였는데도 이들만의 임금을 삭감한 것은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고 봤다. 불이익에 대한 별다른 조치도 없었고, 명예퇴직제도 역시 보상 방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연구원이 실제로 성과연급제 대상 근로자의 목표 수준을 낮게 설정하고 그에 따라 평가했는지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강조했다. A씨의 업무 내용과 목표 수준이 임금피크제 도입 전후와 비교해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가 됐다.
다만 하급심에서 진행 중인 임금피크제 효력은 개별 사안별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임금 삭감의 폭이나 기간, 대상 조치의 적정성 등을 따져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법조계 “하급심 영향 전망” 제도 개편 불가피
이번 판결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장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는 유사한 하급심 소송에서 판단이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한다.
2019년 이른바 ‘문경레저타운 임금피크제’ 소송의 대법원 판단이 나온 이후 노동자들이 줄소송을 제기했지만, 하급심에서는 대부분 노동자가 패소한 상황이다. 당시 대법원은 과반수노조의 동의를 얻은 취업규칙에 따라 도입한 임금피크제라도 연봉계약을 체결한 노동자 당사자 동의 없이는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A씨를 대리한 김선종 변호사(법무법인 산경)는 “연령의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이 법률에 정해져 있는데도 적용되지 않는 판결이 많았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은 확실하게 임금피크제에 관해 필요한 요건과 정당성을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기업이 정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를 연령이 많다는 이유로 차별한 것에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며 “앞으로 사용자가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려면 정년을 연장하든지, 아니면 업무 조정을 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금피크제는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처음 도입한 이후 2015년 모든 공공기관에 적용됐고, 민간기업으로 확산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정년제 운용 사업체의 임금피크제 도입률은 22%다. 34만7천 사업장 중 7만6천 곳이 임금피크제를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