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잡고와 (재)공공상생연대기금이 함께 주최한 노조파괴 공작의 국가배상 책임을 묻는 ‘공개법정’이 지난 20일부터 이틀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 2층 울림터에서 진행됐다. <홍준표 기자>

“이 사건은 국가권력이 정보기관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노조를 와해시키고자 한 사건이다. 원고들은 피고들의 일련의 불법행위로 인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의 단결권 침해의 피해를 입게 됐다. 재판부 역시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사건번호 2021가합47000. 재판장이 의사봉을 치며 판결문을 낭독하자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노조파괴 공작을 벌인 국가기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순간이었다.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은 민주노총에 21억원, 전교조·공무원노조·서울교통공사노조에게 각 5억원을 지급하라. 피고들은 공동해 금속노조에 10억원, 원고 이정훈(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장)에게 각 2천만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국정원, 민주노총 산하 노조 탈퇴 공작’ 법정 공방
재판장에 최병모 전 민변 회장, 법률가 집중 심리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손잡고)와 (재)공공상생연대기금은 지난 20일과 21일 이틀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노조파괴 공작의 국가배상 책임을 묻는 ‘공개법정’을 열었다. 노동문제를 다룬 최초의 시민 법정이다.

모의재판 형태로 진행됐지만 피해 당사자와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재판장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을 역임한 최병모 변호사가 맡았다. 배석판사에는 조영선 변호사(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박은정 인제대 교수(공공인재학부)가 위촉됐다.

이번 재판은 공소시효 만료 등으로 실제 법정으로 가지 못한 사건들을 다뤘다. 국가정보원과 현대자동차 등이 노조 조직 및 운영에 불법적으로 지배·개입해 노동권을 침해한 부분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질지가 쟁점으로 다퉈졌다.

원고는 민주노총과 조합원, 피고는 대한민국과 현대차·심종두 전 창조컨설팅 대표가 선정됐다. 김상은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와 하태승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가 원고를 대리하고,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와 송영섭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가 피고를 대리했다.

재판 첫날에는 ‘국정원의 노조파괴’와 관련해 법정 공방이 펼쳐졌다. 원고측은 2009~2011년 국정원이 노조 운영에 지배·개입해 21개 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측은 국가가 아닌 해당 공무원에게 책임이 있고,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증인신문에서도 양측 공방은 팽팽했다. 2009년 국정원의 공작으로 KT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할 당시 이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고 해고된 조태욱씨가 원고측 증인으로 나와 국정원 개입 내용을 진술했다.

‘국정원 직원’ 대역 증인신문 진행
“모른다” 일관하자 재판장 질타

특히 첫날 재판에는 ‘국정원 직원’이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 국정원의 노조 개입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정식 재판이 아닌 터라 재연배우 최아무개씨가 대역을 맡았다. 최씨는 2009~2011년 국정원 3차장 산하 심리전단 방어팀에서 근무한 직원 역할을 대행했다. 증인신문 이후 현실감이 있었다는 방청객의 호평이 쏟아졌다.

‘국정원 직원’ 최씨는 원고측 증인신문에서 국정원의 노조파괴 공작을 부인하고 증언을 거부했다가 재판장 질타 이후 태도가 바뀌었다. 원고측 신문에서 최씨는 “윗선 지시로 보수단체를 만났다” “접선 지시로 일부 교육단체, 학부모단체와 만났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은 윗선이 지시한 내용을 이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최씨는 재판 직후 “(연기 몰입에 방해될 것 같아) 조합원의 진술을 듣지 않으려 했는데, 감정이 이입돼 힘들었다”며 “잘 몰랐던 사건인데 이번 계기를 통해 노동자들의 환경이 바뀌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판은 전문가 증인으로 나온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법학)에 대한 증인신문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지난 20일 오후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노조파괴 공작의 국가배상 책임을 묻는 ‘공개법정’에 국가정보원 직원 대역을 맡은 재연배우(사진 맨 오른쪽)가 나와 증인신문을 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지난 20일 오후 전태일기념관에서 진행된 노조파괴 공작의 국가배상 책임을 묻는 ‘공개법정’에 국가정보원 직원 대역을 맡은 재연배우(사진 맨 오른쪽)가 나와 증인신문을 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유성기업 노조파괴’ 현대차·심종두 손배 책임 공방
원고 청구 전부 인용, 재판부 “사법부 일원으로 매우 유감”

둘째 날에는 현대차 협력업체인 유성기업의 노조파괴에 대한 현대차와 심 전 대표의 손해배상 책임을 따지는 재판이 진행됐다. 원고측은 현대차와 창조컨설팅·유성기업이 공모해 유성기업지회의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2011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9년간 계속됐다고 주장했다.

이후 증인신문에는 도성대 금속노조 유성기업아산지회장·이정훈 유성기업영동지회장을 비롯해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유금분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심리상담실장·김성훈 전 KEC지회장 등이 증인으로 나왔다.

재판부는 원고의 청구를 전부 인용했다. 재판부는 “노조파괴 공작은 국가 정보기관이 국정원법에 근거해 엄격히 한정된 직무범위를 명백히 일탈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며 “노조파괴 공작 수행 과정에서 노조설립 주도자에 대한 해고를 지시하는 등 불법적인 수단을 남용했다”고 질타했다.

재판부는 “특히 국가는 민주노총 산하 조직으로 하여금 탈퇴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사용자와 접촉해 부당한 압박을 가하게 하고, 신규노조 설립을 주도하는 자에 대해 불이익을 가하게 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81조가 규정한 범죄(부당노동행위)를 교사 내지 방조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선고 전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복직했지만 여전히 100억원대가 넘는 손배·가압류 소송이 진행 중”이라며 “공개법정은 매우 중요하다. 노조파괴로 인해 저희처럼 고통받지 않고 출발하는 시작이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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