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들, 고통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은 있나요?

          대선 후보들, 고통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은 있나요?

강신주 | 철학자
 

아침, 아니 정확히 말해 아직 이른 새벽, 고요한 산사에는 목어와 범종 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진다. 가슴 깊은 곳에 파고드는 범종 소리는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누구를 깨우는 것일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오늘도 생명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 토끼를 먼저 깨워야 한다. 늑대가 먼저 깨어나면 토끼가 먹잇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늑대를 죽여서 토끼가 편하게 살도록 할 수도 없다. 늑대는 또 무슨 죄인가? 무엇 때문에 다른 짐승의 살을 뜯어먹고 살도록 태어난 것일까? 하지만 육식 동물들이 항상 사냥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늑대는 항상 말라 있다. 일주일에 하루 사냥에 성공하면 기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마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토끼를 잡아다 늑대에게 줄 수도 없다. 새벽 산중을 깨우는 목어, 범종, 법고 등의 소리는 그래서 아픈 소리다. 토끼에게는 오늘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말라는 기원을, 그리고 늑대에게는 오늘 굶지 말라는 소망을 담아 보내는 소리인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이기라도 할까. 인간처럼 죄가 많은 존재도 없으니까 말이다. 풀을 뜯어먹는 토끼나 토끼를 잡아먹는 늑대처럼 우리도 식물을 먹고 동물도 잡아먹고 산다. 사실 우리는 늑대나 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이다. 어쨌든 생태계의 최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물짐승, 날짐승, 들짐승 등을 다 깨우고, 제일 마지막에 깨워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스님들이 조금도 음식을 남기지 않고 공양을 마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음식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야 다른 애꿎은 생명체들을 해치는 비극을 그나마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자비의 마음이란 바로 이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아니라면 자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적 용어가 싫다면, 인류의 수많은 지성이 목놓아 외쳤던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길을 가다가 구걸을 하는 걸인을 보고 그가 느낄 삶의 고통과 비애를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를 못 본 척하고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의 고통이 느껴졌다면, 그의 고통은 이제 나의 고통이기도 하니까. 지갑의 돈을 꺼내 집어주던가, 아니면 옷을 벗어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의 고통이 이제 나의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꺼리겠는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나의 돈을 주었으니 나는 가난해진 것이고, 나의 옷을 벗어주었으니 나는 추워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나의 고통은 완화될 수 있으니, 그깟 돈이나 옷이 대수이겠는가. 결국 진정한 사랑이 외적인 형식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사랑의 척도, 혹은 사랑의 깊이는 사랑의 행동 이후에 얼마나 자신이 궁핍했는지, 나아가 그 궁핍을 얼마나 행복하게 감당하는지에 의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진 재산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재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랑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그 대가로 세금 감면 혜택을 받거나, 아니면 귀족적 고상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배고픈 사람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준 사람이나 더 추운 사람에게 옷을 벗어준 사람은 자신이 사랑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 배고파졌으니까, 그리고 더 추워졌으니까 말이다. 삶의 아이러니, 혹은 자본주의의 슬픈 현실은 가난한 사람에게 재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가난한 사람의 사랑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데 있다. 그렇다. 사랑을 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이처럼 사랑을 받기는 더군다나 더 힘든 일이다.

 


▲ “마을 사람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장이 되어서는 안되고,
국민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아들이 아플 때 자신이 아픈 것처럼 느끼는 어머니라면,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피곤함과 궁핍함을 달게 감내할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그녀가 어머니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만약 옆집 아이가 아팠을 때도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만 있다면, 그녀는 통장이나 이장이 될 수 있고, 아니 되어야만 할 것이다. 반면 통장이나 이장이 되려는 어떤 여성이 자기 자식의 고통만 느낀다면, 통장이나 이장이 된 뒤에도 그녀는 아마 마을 사람들의 경멸과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식을 제외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가난과 궁핍을 기꺼이 감내하기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이것은 통장이나 이장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보다 지위가 높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준칙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통장이나 이장이 되어서는 안되고, 국민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 범위까지만 우리는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불행히도 보편적인 고통을 요구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잉여가치를 남기려고 맹목적으로 운동하는 자본이 지금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규모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자본이 위기에 빠질 때, 그러니까 공황이나 불황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돈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자본가들도 광고비나 교육비를 줄이고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면서 돈을 비축하려고 한다. 청년실업 문제가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악몽처럼 조금씩 찾아오고 있는 셈이다. 1929년 대공황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졌었던가. 심지어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이 필요했을 정도였다. 그 사이에 또 얼마나 가여운 생명들이 이 세상을 떠났는지. 무서운 일이다. 자본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맹목적이고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자비한 괴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다양한 공약을 내걸고 경쟁하고 있는 대선 후보들은 과연 자본의 맹목적 운동에 희생될 국민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사회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던지는 장밋빛 미래에 취할 때가 아니다. 당신도, 당신도, 그리고 당신도, 그리고 당신의 남편도, 당신의 아내도, 당신의 자식도 자본의 희생양이 되는 위기가 먹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대선 후보들에게 묻도록 하자. “생계가 불안정해질 나의 고통, 정리해고가 될 나의 고통, 취업이 힘들어질 나의 고통! 당신은 그것을 느끼고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그리고 집요하게 그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이 받을 표는 미래의 실직자, 미래의 비정규직 노동자, 미래의 실업자, 그러니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표다. 그러니 당신의 표는 고통 받을 사람들의 표다. 그 임박한 미래에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혹시 당선된 뒤 당신은 자본이 회복되어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궤변을 늘여놓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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