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우리 사회

수익금 쌓아 서민금고로…‘위기때 빛난’ 협동조합 은행
등록 : 20110704 21:01 | 수정 : 20110704 23:17

 

유럽 대안경제의 힘 협동조합 기업을 가다 - 네덜란드 라보뱅크 ‘안전신화’

?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시에 있는 라보뱅크 본사 사옥. 이 은행은 가난한 농민들의 적립금을 115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네덜란드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은행이 됐다.
농민들 뭉쳐 설립…네덜란드 국민절반이 조합원
무출자·무배당 원칙…이익금으로 대출금리 낮춰
금융위기때 예금 20% 증가 등 ‘115년간 안전성장’

네덜란드의 최대 은행그룹인 라보방크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은행’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 때 진가를 발휘했다. 다른 은행에서 빠져나온 안전자산 선호 자금들이 몰려오면서 예금자산이 20%나 늘어났다. 국내 대출시장 점유율도 사상 최고인 42%까지 올라갔다.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에스앤피(S&P)는 지난해 12월의 평가보고서에서 “높은 금리를 제시하지 않고도 대규모 예금을 유치한 것이 은행 경영에 큰 도움이 됐고, 그런 추세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에스앤피와 무디스는 라보방크에 대해 가장 높은 AAA의 신용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라보방크는 115년 역사의 협동조합 은행이다. 1896년에 농민들이 시작했다. 고리채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이웃 독일의 라이파이젠신용협동조합 성공에 자극받아 “혼자는 가난하지만 힘을 모으자”고 나섰다. 신용평가기관들은 “라보방크가 금융위기에 강했던 이유는 독특한 협동조합 경영방식 덕분”이라고 한결같이 분석했다. 지금 라보방크는 네덜란드 국민의 절반이 조합원이고, 자산규모로는 세계 25위에 올라 있다.

라보방크 경영은 기본적으로 라이파이젠협동조합 원칙을 따른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무출자, 무배당, 내부 적립’ 원칙이다. 출자가 없기 때문에 이익 분배가 없었고, 100년 이상 이익금을 고스란히 적립할 수 있었다(지금은 출자 제도가 부분적으로 생겼다). 실제로 라보방크의 자기자본 400억유로 중 300억유로(46조5000억원)는 이미 고인이 된 선대 조합원들이 쌓아놓은 유산이다. 라보방크의 지배구조 담당 임원인 빌베르트 판덴보스는 “외부 자본 조달 없이도 라보방크가 성장과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조합원들의 적립금 덕분이었다”며 “지금도 라보방크의 협동조합 심장은 뛰고 있다”고 말했다.

라보방크는 정해진 관할 지역에 집중해 사업을 벌이고, 이사 보수 등의 사업비를 줄이고 (그래서 대출금리와 수수료를 낮추고) 지역사회 서비스에 일정분의 잉여금을 할당한다는 원칙도 지금까지 소중히 지키고 있다.

라보방크가 지금의 모습으로 대도약을 꾀한 것은 1972년이었다. 지역망을 거느린 2개의 협동조합 은행을 하나로 합쳐 라보방크라는 중앙은행을 탄생시켰고, 1200여개에 이르는 지역은행들을 141개로 합병해나갔다. 라보방크의 중앙은행은 농업 이외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글로벌 무대로도 적극 진출했다.

규모화에 따른 협동조합 정신의 퇴색을 우려해, 조합원으로부터 올라오는 지배구조의 틀도 다시 다졌다. 지역은행 9~20곳이 기초위원회를 조직하고, 기초위원회의 대표자들이 6개 지역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시 하나의 중앙위원회로 올라간다. 위원회마다 분기에 한 차례씩 총회를 열어 중요한 경영 현안을 논의한다. “지역 농민들이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이슈를 다루는”, 주식회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배구조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에 돋보인 협동조합 은행은 라보방크만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말고도 대규모 협동조합이 있는 핀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이들 6개 나라의 협동조합 은행 점유율은 40%에 이르지만, 금융위기 때의 손실 비중은 전체의 8%에 그쳤다. 스위스의 라이파이젠 은행은 2008년 이전까지 스위스 국내 10위 바깥에 있었지만, 예금 급증으로 순식간에 4위로 올라섰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마리아 엘레나 차베스 협동조합국장은 “협동조합 은행들은 2008년 금융위기나 1930년대 공황 같은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며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투자해 단기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서민과 중소기업 같은 조합원들에게 안정적인 자금을 공급하는 일에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트레흐트(네덜란드)/글·사진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 덴마크 협동조합연합회의 임원인 수잔느 베스타우젠
“주주 배불리는 돈벌이 대신일자리창출 등 사회에 기여”

덴마크 협동조합 사람들

“급하게 돈 벌려 하지 않고 투명하고 단순하게 사업을 합니다. 잘 아는 사람들이 고객이잖아요. 대신 좋은 상품을 만들며 일자리를 유지하지요. 주주 호주머니로 이익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내년에 창설 90년을 맞는 덴마크 협동조합연합회의 임원인 수사네 베스트하우센은 협동조합 경영방식을 이렇게 쉽게 풀어 설명했다. 덴마크에는 건축, 학교, 약국, 박물관, 인쇄소, 방송 등 거의 모든 사업 분야에 협동조합이 진출해 있다. 은행·보험·여행·주택 협동조합의 규모가 가장 크다. “이익이 발생했다 해봅시다. 보험 협동조합에선 다음해 보험료를 낮추는 데 쓰고, 노동자협동조합에서는 급여 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또는 복지비용으로 씁니다. 이렇게 재투자되니까, 상품과 서비스 질이 높아질 수밖에요.”

젊은이들은 우리의 사회적 기업과 비슷한 ‘사회적 협동조합’에 많이 뛰어든다고 했다. “자원봉사자로 커피숍을 운영해 아프리카를 지원하거나, 숙련도가 떨어지는 흑인 여성들의 봉제공장을 만드는 식입니다. 팔 하나 없는 장애인들도 고용합니다. 생산성이 좀 모자라도 주주 이윤이 빠져나가지 않으니까 유지가 가능하지요.”

베스트하우센은 주택협동조합을 결성해 2008년에 주택을 장만했고, 생협과 은행·보험·박물관 협동조합에도 가입해 있다. “백만장자가 인생의 목표라면 협동조합 하지 마세요.”

‘메르쿠르’라는 협동조합 은행에서 일하는 메테 튀센은 “우리 은행은 지속 가능한 사업에만 투자한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사업자들이 고객의 다수입니다. 협동조합이 사회에 기여한다고 보거든요. 메르쿠르는 가치있는 사업에 투자하는 세계 13개 은행의 국제연맹에도 가입했습니다.”

통상의 협동조합처럼 메르쿠르의 고위직도 연봉을 적게 받는다. 최고위직이래야 평균 급여의 2배에 불과하다. “전체 평균 급여는 일반 은행과 비슷하니까, 하위직 연봉은 높습니다. 다른 은행에서 옮겨온 직원들은 자유롭게 일하는 사무실 문화를 좋아합니다. 우리 은행에서는 가치가 급여의 한 부분입니다.”

코펜하겐 앞바다에는 20기의 대형 풍력발전기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중 10기는 미델그루넨이라는 발전협동조합의 작품이다. 코펜하겐의 전기 소비자들이 출자한 1억7500만크로네(250억원)로 만들어냈다. 스테판 나에프는 미델그루넨의 무보수 이사를 맡고 있다.

“생산한 전력은 배전회사에 팔고, 조합원들은 환경에 기여한다는 만족감을 느끼지요. 수익성이 좋지는 않지만, 호기심 많고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주머니를 엽니다. 2년마다 조합원 모두를 초청해 풍력발전기 꼭대기까기 올라갈 수 있도록 합니다.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조합원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거죠. 지금은 한 해 두 차례 약간의 배당도 합니다.”

코펜하겐/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협동조합 허무는 ‘거꾸로 농협’

시장경쟁력·수익창출 좇아
판매부문등 지주회사 추진

농협중앙회의 신용부문은 2008년 금융위기 때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2007년까지 1조원대를 훨씬 웃돌던 순이익 규모가 2008년 이후 지난해까지 3000억~4000억원대로 곤두박질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기적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농협은 신용부문과 경제(판매사업)부문을 각각 주식회사 형태의 지주회사로 분리하는 사업구조 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신용부문을 비효율적인 농협 조직에서 떼내어 시장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다. 경제부문의 분리는 제대로 조합원 판매사업을 해보자는 데 맞춰져 있다.

신용부문의 분리는 그동안의 경영 비효율과 불투명성을 해소하자는 명분을 업고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원칙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지배구조에 대한 논의가 실종돼 있다. 농협 관계자는 “농협에서 떼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잘 떼내야 한다”면서 “지역조합의 출자권이 작동할 수 있는 지배구조를 세우고 동시에 경영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전문가들은 유엔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인 2012년을 앞두고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에 힘을 모으고 있다. 농협법, 생협법과 같은 8개 특별법으로 나뉘어 있는 법체계를 하나의 기본법으로 정리하자는 요구다. 한국협동조합연구소의 김기태 소장은 “다양한 형태의 자발적인 협동조합 설립을 법체계가 가로막고 있다”면서 “서로 다른 협동조합들 간의 공동사업도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을 총괄하는 정부 조직을 둬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되고 있다. 해당 부처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 협동조합 사업의 성격이 달라지는가 하면, 전체 협동조합 정책과 관련된 일이 정부 어떤 조직도 돌아보지 않아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김현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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