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ㅣ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코로나19는 분명 세계적 재앙이지만, 우리에겐 뜻밖의 선물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70년 동안 그 무엇도 깨뜨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일거에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는 가히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인의 인식 틀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사물의 질서’라고 여겨온 거대한 세계가 더 이상 당연한 것도, 견고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이가 늘고 있다.
한국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미국의 참상이다. 미국이 저렇게 처절하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자 선진국의 표상이었다. 한국은 반미주의가 가장 약하고, 미국에 대한 환상이 가장 큰 나라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제3세계 수준의 삶을 산다는 사실, 게다가 국민의 생명을 지켜줄 공공의료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코로나 사태는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환상을 산산이 깨뜨렸고, 맹목적인 미국 추종의 관성에 날카로운 의문부호를 새겼다.
코로나를 계기로 우리가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작동하는 거대한 질서, 즉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있다. 발전 이데올로기, 성장 지상주의가 흔들리고, 신자유주의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각 나라를 돌며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공공성의 폐허를 폭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지난 세기에 사회주의와의 생산성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두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체제다. 첫째는 자본주의란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는 이를 흔히 ‘야수 자본주의’라고 한다. 한국은 야수 자본주의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사납게 활개 치는 나라다. 야수를 길들이기는커녕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지지하는 자들이 국회에서 9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 노동시간, 자살률, 기업살인율(산업재해사망률)을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둘째 결함은 자본주의는 생산을 계획하고 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자전거 자본주의’의 문제다. 달리다 서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자본주의도 달리다 멈추는 순간 넘어진다. 그러니 무작정 정처 없이 달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수요가 없는데도 무한히 생산하는 ‘과잉생산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생산’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산은 자연의 변형 내지 파괴가 아닌가. 결국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무한히 자연을 파괴하는 체제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할 생태적 묵시록 때문에 유럽에선 인류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22세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사는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될 것이다’라는 유의 담론이 유럽의 공론장을 풍미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는 세계 어디에서나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되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그 충격파가 크다. 한국은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지극히 낮고, 찬양 일변도의 논리만이 지배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사회가 경이로운 정치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음에도 헬조선이 된 이유는 패러다임, 즉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 틀 자체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틀은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다.
단언컨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본주의가 작동한다면 22세기는 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세기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외쳤다. 최근 독일 중고등 학생들의 시위를 보니 ‘자본주의냐 삶(생명)이냐’라고 목청을 높인다. 자본주의를 위해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삶을 위해 자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자본주의를 인간화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전도시켜 인간을 소외시키고, 불평등과 실업으로 사회를 붕괴시키며, 무한생산과 무한경쟁으로 자연을 파괴한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고 공존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모델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