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주목노동과 관종경제

기사입력2019.05.30. 오후 5:05
최종수정2019.05.30. 오후 7:20

박권일
사회비평가

4월 초, 일본의 어느 여성이 주먹밥 한입에 먹기 영상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던 도중 질식해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괴로워하며 쓰러지고 구급대원이 현장에 도착하는 충격적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3월에는 유튜브 영상을 찍기 위해 한강으로 들어간 한국의 남성이 익사한 사고도 있었다.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건 극단적인 경우지만 소셜 미디어 등에서 위험한 짓을 벌이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고소득 유튜버들이 언론에 부각되면서 이를 유망 직종으로 오해하는 이도 적지 않다. 유튜브에서 활동해본 사람이라면 잘 안다. 거기서 돈 만원 벌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열정적으로 영상을 올린다. 순전히 돈이 목적이 아니란 얘기다. 소셜 미디어에 먹방 사진 올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원하는 건 하나, 타인의 관심이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간이 힘들게 노력하고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거라면 노동자의 최저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쏟고, 아는 척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이미 알고 있었던 진실은, 고도정보사회인 오늘날에 와서 더욱 밀도 높은 진실이 됐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은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기 훨씬 전인 1971년에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정보가 풍족한 세계(information-rich world)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은 바로 주목(attention)”임을 간명하게 밝히면서, 정보가 넘쳐날수록 타인의 주목을 쟁취하는 행위가 최우선이 될 것이라 단언했다.

사이먼이 옳았다. 지금 우리는 매일매일 관심과 주목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한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에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올리거나 브이로그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기록하기도 하고, 남들이 올린 이미지와 텍스트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욕설과 조롱 댓글을 다는 데 엄청난 시간을 쏟는다. 과거에 타인의 관심을 얻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로가 제법 다양해졌다. 소셜 미디어 같은 매체의 발전은 옛날에는 극소수 부자나 예술가만 받을 수 있던 주목을, 이제는 노력 여부에 따라 보통 사람들도 획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주목경쟁은 허세나 허영이기는커녕 그야말로 ‘가성비 갑’의 합리적 선택이 된 것이다.

이제 주목경쟁을 넘어 주목이 노동이 되는, 즉 주목노동(attention labor)의 시대가 됐다. 그런 짓들이 무슨 노동씩이나 되냐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실제로 구글, 유튜브 같은 플랫폼은 우리의 그런 행위 하나하나를 수집하고 분류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추출하고 있다. 기업은 돈을 벌고 개인은 관심을 버니,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거 아닐까. 이런 게 바로 ‘관종’(관심종자)이 승리하는 관종경제일 게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렇듯, 알고 보면 아름답지만은 않다. 주목노동과 관종경제에도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 같은 게 있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주목의 승자독식’ 현상이다. 이미 매력자본을 많이 가진 개인은 과거 같으면 주변 사람 몇몇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관심을 지금은 훨씬 넓은 영역에서 빨아들일 수 있게 됐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다른 대다수 자원처럼 주목이라는 자원 역시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회 전체의 인지 자원이 주목도 기준으로 편중되면서 다양한 사회적·윤리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쉽다는 점이다. 진위 여부나 긍정적 평판보다 선정성이 지나치게 우위를 점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들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 주목노동의 과실을 소수 플랫폼 기업이 독식하는 것 역시 큰 문제다.

우리는 예전에도 ‘관종’이었지만 오늘날 점점 더 ‘관종’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관심은 존재의 이유가 됐다. 그러나 더 좋은 사회는 존재가 관심의 이유가 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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