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30년 가까이 KT에서 일하다 올해 그만뒀다. 지금은 중소 IT업체 부사장으로 있다. 지난 8일 오후 그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날은 KT와 KTF가 합병된 지 꼭 100일째 되던 날이다. 그에게 KT와 이석채(64) 회장에 대해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하기가 껄끄럽다고 했다. "어차피 이쪽 바닥(통신업계)에서 앞으로도 먹고살아야 하는데..."라면서 조심스러워했다.
'그냥 편하게 말해달라'고 하자, "이미 밖에 나온 사람이 뒤늦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면서 "할 말이 있었으면 안에 있을 때 했어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석채 회장의 (KT) 개혁에 대한 평가가 좋은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A씨는 "KT가 민간기업이 된 지 벌써 7년이 흘렀는데도 정치권이든, 정부든 우리를 마치 자신들의 자회사나 되는 양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30년 전직 KT맨의 한숨... "점령군이 따로 있나?"
그는 "KT 스스로 과거 공기업시절의 구태를 버리지 못한 탓이 크다"면서도 "기업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변화든, 혁신이든 할 수밖에 없지만 요즘같이 '위에서 내리찍는 변화가 얼마나 오래 갈까'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올초부터 진행돼 온 이석채 회장의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 등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새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그의 말을 약간 옮겨본다.
"마치 무슨 점령군 같은 느낌이 들었어. (이 회장이) 데리고 온 임원들 면면을 보세요. 훌륭한 민간 전문가들도 계시지만, 지금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이 회장은 그동안 KT 개혁을 위해선 위쪽부터 물갈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도 높은 내부감사로 각종 비리를 들춰내고 외부인사 수혈을 통한 조직문화 혁신을 추진해왔다.
그는 "과거의 잘못된 비리나 구태는 당연히 없애야 한다"면서 "하지만 공정하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지 무슨 지역, 무슨 라인에 잘 서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MB맨 이석채의 KT 속도전, 대대적인 물갈이 속 특정 라인 형성도
이석채 회장이 KT에 들어온 것은 올 1월. 작년말 남중수 전 KT 사장과 조용주 KTF 전 사장 등이 비리 혐의로 전격 퇴진하면서, 업계에선 차기 사장으로 '이석채 전 장관'의 이름이 퍼졌다.
정통 관료 출신인 그는 김영삼 정권 때 정통부 장관과 경제수석 등을 지내면서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과거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 선정과정에서 특정 업체를 도왔다는 혐의로 기소됐지만,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은둔의 세월을 보내다, 이명박 정부 들면서 국민경제자문위원회 자문위원으로 부활했다. KT는 정관을 바꿔가면서까지 그에게 사장 후보 자격을 주었고, 업계의 예상대로 그는 KT 사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올 3월 '회장' 자리를 만들어 KT 초대 회장으로 올라섰다.
이후 KT의 변화는 이미 알려진 대로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이 회장의 스타일에 KT는 대대적인 내부 인사 물갈이와 조직 개편 등으로 큰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특히 지난 6월 KTF와 공식 합병한 이후 이석채의 KT 속도전은 더 탄력을 받는 양상이다.
인사 물갈이는 위에서 시작됐다. 20여 명에 달하는 외부인사가 KT의 핵심 임원으로 수혈됐다. 이 가운데는 이명박 정부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인사 다수가 포함됐다. 지난 18대 한나라당 총선후보로 나섰던 석호익 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을 대외부문장(부회장)으로 영입한 데 이어, <조선일보> 출신으로 잠시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조용택씨가 대외전략실장으로 들어왔다.
또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 모바일팀장이었던 김규성씨도 KT 엠 하우스 사장으로,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서종렬씨는 미디어본부장으로 KT에 입성했다. 이밖에 이명박 정부 첫 여성부 장관 후보였다가 낙마한 이춘호씨와 인수위에서 기후에너지변화태스크포스팀장이었던 허증수 교수(경북대) 등은 사외이사로 KT에 몸담고 있다.
KTF와 KT 출신 직원간의 여전히 낯선 통합... "급여 차이가 얼만데?"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가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 서울고검 검사 출신인 정성복 윤리경영실장(사장)은 대대적인 내부비리 척결에 나섰고, 협력업체로부터 금품수수 등의 혐의가 있는 임직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직원들은 바짝 움츠러들었고, 이후 KT의 옷을 벗고 떠난 사람이 상당한 숫자에 이른다.
KT 이아무개 과장은 "분명 조직이나 업무의 투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긴 하다"면서 "하지만 전보다 직원간 경쟁이 강조되고, 조금의 오해 소지가 있을 법한 행동은 꺼려지면서 직원끼리의 신뢰감이나 믿고 따르는 정서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KT와 KTF 통합 이후 직원간의 화학적인 결합이나 시너지 효과도 아직은 미지수다. 물론 KTF 직원들 상당수가 KT 내에서 별도의 무선통신 업무를 유지하고 있지만, 기존 KT와 업무가 중복되는 부서 등에선 유기적인 결합이 쉽지 않아 보인다.
KT 출신인 김아무개 차장은 "(KT)F 쪽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경우 우리보다 연봉이 50% 가까이 더 많이 받고 있다"면서 "통합 과정에서 과도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같은 일을 하면서 급여에서 수천만원씩 차이가 나면 아무래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KTF 출신의 한 직원은 "과거 이동통신 업계에선 KTF가 상대적으로 급여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면서 "KT로 들어오면서 일단 급여는 유지하고 있지만, 일부 직원은 중요 업무배치 등에서 밀리는 등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쿡'과 '올레'로 살벌해진 마케팅 전쟁, 통신판은 흙탕물
이같은 내부 조직개편과 함께 외적인 변화도 계속되고 있다. KTF와 합병하면서 통신시장에 '쿡(COOK)' 브랜드를 선보였고,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으로 '올레(Olleh) 경영'을 강조했다. 기업 이미지도 기존 'KT'에서 'Olleh kt'로 바꿨다.
KT 관계자는 "올레 경영은 과거 무겁고 딱딱한 KT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생동하는 기업의 모습과 함께 혁신적인 서비스로 변화를 이끌어가겠다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이석채 회장도 지난 8일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나는 KT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KT의 기득권을 버리고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면서 "지금은 모든 서비스와 제품이 융합되는 컨버전스 시대이며,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8개월 넘게 통신판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KT의 상반기 경영실적도 그리 나쁘진 않다. 1분기에 이어 2분기에도 영업이익이 50% 가까이 올랐다. SKT 등 다른 경쟁사보다 높은 수치다.
하지만 전체 기업 매출은 2.7%가량 줄어들어, 기업의 성장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어 KT의 핵심사업군인 유선사업분야, 집전화 이용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것도 불안하다. 매달 7만명 가까운 사용자들이 KT 집전화를 버리고, 인터넷 전화로 갈아타고 있다. 이 분야에서만 매년 1조원 이상의 매출이 빠지고 있다.
또 막대한 투자가 들어간 무선 와이브로 사업은 여전히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쿡'으로 대표되는 IPTV(인터넷TV) 사업 역시 아직까지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동통신 사업도 SKT의 독주를 막기 위해 미국 애플사와 '아이폰' 도입을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지만 이 역시 계속 늦춰지고 있다. 일부에선 이미 국내 경쟁업체들이 아이폰과 유사한 서비스와 단말기를 내놓고 시장을 선점해가고 있어, KT의 속앓이도 계속되고 있다.
통신업계의 한 임원은 "이석채 회장이 KT를 맡은 후 과거보다 많이 변화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일부에선 이 회장이 과거 장관시절에 기업들 상대하던 모습을 아직 버리지 못한 채, 무리하게 시장을 흔들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고 소개했다.
여하튼 이석채의 KT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바람이 단순한 이석채 개인의 향후 입지만을 다지고 끝나는 미풍(微風)으로 끝날지, 아니면 KT를 비롯해 통신업계 전반의 새로운 성장동력과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태풍으로 바뀔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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