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이스라엘, 작았지만 출발이 당당했던 이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쇠약해졌다가 차례로 망해버렸다. 먼저 북녘이, 그다음 남녘이 강대국들의 억센 주먹에 무너졌다. 허리가 동강난 몸이라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했다. 그러고는 한 오백년쯤 이놈에게 치이고 저놈에게 밟히더니 결국 서기 70년 로마 군대가 와서 수도 예루살렘을 뭉개버리고는 지도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성경은 우뚝 일어섰던 나라가 어떻게 폭삭 망해버렸는지 소상하게 가르쳐주는 역사 교과서다. 누구보다 분단 코리아를 위한 타산지석이다.
저 잘난 겨레가 왜 망했을까. 성경은 파멸의 단서를 쇠심줄처럼 질겼던 ‘고집’에서 찾는다. 하느님은 비극을 막아 보려고 “이러다가 오래 못 간다”며 어르고 달랬지만 목이 뻣뻣한 족속은 못 들은 체하였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전해질까. “그들은 모두 고집 센 반항자들, 썩어빠진 짓만을 저지른다.”(예레미야 6, 28)
보다 못한 하느님이 자신의 타는 속을 꺼내 보였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애지중지 아끼고 어루만졌던 포도밭, 이스라엘이 얼마나 망가졌기에 이토록 애달파하셨을까.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째서 시고 떫은 개살구가 열렸느냐?” 이게 무슨 소리일까. “공정을 바랐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며 정의를 바랐는데 울부짖는 저 소리들은 어찌 된 일이냐?”라는 탄식이었다.
예루살렘 붕괴를 직감한 예수는 우화 하나를 들려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어떤 사람이 각고의 노력 끝에 어엿한 포도밭을 갖게 되었는데 형편상 남의 손에 맡기고 멀리 떠났다. 여기서도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뜻한다. 추수철이 되어 사람을 보냈는데 작인들은 소작료 대신 살인을 저질렀다. 심부름꾼들을 모질게 구박하다가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다. 심지어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 없앴다. 그 당시 어리석은 위정자들은 이런 식으로 공정을 바라는 하느님께 대들고 고집을 부렸다.
많은 겨레의 선지식들이 나라가 무너진다며 피를 토해놓고 죽어갔지만 고집 센 족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언짢은 열매만 맺는 나무를 가만두었다. 최악의 소작인을 내쫓지도, 성실한 농부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년에는 혹시 제대로 열리지 않을까, 언젠가는 고분고분 소작료를 내놓지 않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떨었다.
어쩌다 보니 지난 연휴 내내 ‘남한산성’ 주위를 맴돌았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읽어보고, <역사평설 병자호란 1·2>를 뒤적였다. 대략 임진년 왜란 후 30년 만에 정묘년 호란이, 10년 후 다시 병자년에 호란이 일어났더라. 한 번 당했으면 얼른 고쳐야 하는데 어제와 오늘을 고집하다가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하는 속 터지는 역사가 오늘의 현실과 묘하게 겹쳐서 내내 뒤숭숭했다.
당장 뽑아치우고, 갈아치워야 할 당연지사를 어째서 미루고 뭉개는지 답답하지만 원래 심기는 쉬워도 뽑기는 어렵고, 내주기는 쉬워도 도로 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더군다나 스스로 새로워지는 일은 여간해서 보기 힘든 경사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지지리도 운이 없다. 버릴 것 버리고, 치울 것 치워서 삶의 틀을 바꾸는 “다시 개벽”을 위해 대통령도 새로 뽑고 새롭게 출발을 하려는 그 시간에 북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가 터졌다. 적폐의 잔가시 하나도 뽑지 못했는데 난데없는 ‘사드’까지 날아와 가슴팍에 박혔다. 기막힐 노릇이다.
설상가상으로 보복과 압박의 화로가 우리 머리 위에 얹혀졌다. 중국은 너희가 사드를 받았으니 그런다 하고, 미국은 우리가 사드를 줬잖은가 하면서 제 입맛대로 자유무역 규정을 손볼 참이다. 이런 틈에 법원은 “민중은 개돼지”라고 확신하는 고급 공무원을 복직시키라고 명령했고, 적폐의 저수지격인 전직 대통령은 “안보가 엄중하고 경제가 어려워 살기 힘든 시기”에 적폐청산이라니 “이런 퇴행적 시도는 국익을 해칠 뿐”이라며 대대적인 반격을 예고했다. 몰염치에 화가 나지만 어차피 돌파해야 할 난관들이다.
천년만년 갈 것만 같던 나라마저 고꾸라지게 하는 ‘고집’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도 내일도 알던 대로 알고 싶고 살던 대로 살고 싶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관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풍 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불타는 나무”(도종환) 아래서 여태껏 떨쳐버리지 못한 나의 억센 고집을 돌아본다. 오래된 잎사귀들을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는 분본(糞本)은 가을을 지내는 사람의 본분(本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