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은 아직이다. 입춘에 시작한다

[사유와 성찰]새해 촛불 많이 드십시오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사유와 성찰]새해 촛불 많이 드십시오

마음으로 설을 준비하자. 새해를 맞았으면 “안락하라/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강한 것이나 약한 것이나/ 태어난 것들이나 태어날 것들이나/ 모두 태평하라”(숫파니파타)고 인사해야 마땅하리라. 그런데 돈과 권력, 약물에 취해 흥청망청 갈지자를 그리다가 졸지에 망신살이 뻗친 자들은 이즈음 어떤 말을 소곤거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새해라! 새해에 할 일이 무엇인가? 도대체 새해가 있나? 없다. 새해란 신화뿐이다. … 우러러 하늘을 보자. 거기 새해가 있던가? 없다. 하늘도 늘 퍼런 그 하늘뿐이요, 해도 억만년 그 빛대로 뻘건 그 해뿐이지 다름이 없다.”(함석헌)

앞날에 대한 불안과 원망이 사무쳐 새해는 뭔 놈의 새해냐고 푸념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방금 전의 탄식은 사시사철 진자리에서 뒹구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누천년 한숨 소리였지, “아무도 내 비행을 못 보았다. 나는 죄 받지 않으리라” 주문을 외면서 “잠자리에서조차 못된 일을 궁리하고 악을 꺼리지 않는 자들”(시편)의 비분강개는 결코 아니었다.

이게 얼마 만인가. 모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저놈의 핸 언제나 꺼지느냐 나나 너나 한 가지 없어지잤구나”하던 지루하고 역겨운 시절은 지나가고 있는 걸까? 하마터면 김칫국물 한 모금 정도야 마실 때가 되잖았느냐며 허리띠를 풀 뻔하였다. 구치소에서 몇 시간 서성거리다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가던 제3대 삼성 총수의 유유자적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방심은 금물.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옛사람들은 세 가지만 쥐고(操) 있으면 새해가 복되다고 생각했다. 몸을 붙드는 체조, 맘을 붙드는 정조, 뜻을 붙드는 지조. 꼭 쥐고 꽉 잡고 놓치지 않아야 사람은 꼿꼿할 수 있다. 몸 꼿꼿, 맘 꼿꼿, 뜻 꼿꼿, 이것이 세 가지 조심이다. 조심하면 몸 성하고, 맘 편하고, 영혼이 뜨겁게 타오른다. 그런데 올해는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덕목 하나를 더 보태야겠다. 촛불이다.

대관절 그 가냘픈 물건이 무엇이건대? 그것은 “가만있지 않겠다와 더 이상 가만두지 않겠다는 뼈저린 다짐이다. 기울어 가는 배에서 가만히 있으라던 불의한 명령을 응징하는 우리의 수단이다. 불의와 탐욕과 거짓이 일용할 양식인 자들에게 더 이상 우리의 주권을 맡기지 않겠다는 일종의 명예선언이다.”(김해자) 그렇다면 언제까지 들고 서 있어야 한단 말인가? 정답은 될 때까지다. ‘이만하면 됐겠지’는 큰일 날 소리다. 한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도로 가만히 있게 되면 그들 또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천만년 저질러온 해악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있어요, 없어요?”를 열여덟 번이나 반복한 끝에 “예술인들의 지원을 배제하는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라는 이상야릇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있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배배 꽈서 말하느라 덜덜 떨리던 장관의 입술은 그날 수고가 많았다. 엊그제 삼성그룹 상속인에 대한 영장청구를 기각하던 판사의 손끝도 다시 떨렸다. 구불구불 주절주절 이러저러하므로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자전거 한 대만 훔쳐도 즉각 구속, 실형 선고가 보통인데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충분하다”니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할 수가 없어 진땀만 빼는 영리한 자들의 진퇴양난이 가소롭다. 시중에는 “개·돼지 잡는 칼로 어찌 지체 높은 양반을 잡을 수 있으랴”는 소리가 나돌고 있다.

차라리 잘 됐다.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와 영속불변의 절대 권력자가 누구인지 새삼 분명해졌으니 말이다. 자, 끝낼 것 끝내서 올 것이 오게 하자.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기어코 새 세상을 보자던 노비들의 이야기부터 되살려보자. 새 도읍을 세운다는 소리를 듣고 월출산, 대둔산, 완도, 진도, 저 멀리 추자도의 바위들까지 저마다 미륵이 되기 위해 운주사 골짜기로 몰려들었다. 영차, 영차 힘 모아 구백아흔아홉 개를 세웠다. 드디어 마지막 불상을 일으켜 세울 참인데 누군가 “닭이 울었다!”고 외쳤다. 방해꾼이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지레 힘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뿔싸 새 나라, 새 도읍은 오다 말고 물러갔다. 그런데 그 날 누운 채 그대로 여태껏 와불로 계시는 그이는 누구실까?

정유년은 아직이다. 입춘에 시작한다. 닭의 해, 꼬끼오하는 소리가 마지막 하나를 세우지 못하는 바람에 땅을 치는 통곡이 아니라, 개벽을 알리는 문경(聞慶)의 외침이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모여라. “촛불이 이긴다. 촛불이 길이다”(나눔문화). 새해 촛불 많이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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