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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
1. 77만명이라 했던가.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질 거라던 자들은 촛불에 놀라 꺼 보겠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 김진태는 박사모의 맞불집회장에서 박근혜는 죄가 없다고 우리의 대통령이라고 탄핵 반대를 외쳤다. 지난 9일 국회의 탄핵소추가 있고 다음날 축제의 촛불이 광화문 등 이 나라 광장에서 아직 촛불을 끌 수가 없다고 외치고서 다시 온 토요일, 12월17일 1주일 만에 열린 촛불집회였다. 탄핵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촛불에 맞서겠다고 태극기 물결의 맞불집회가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이렇게 이 나라의 국기는 헌법과 민주공화국 질서를 짓밟는 반동의 깃발이 되고 마는가. 변혁과 보수, 반동이 뒤섞인 날, 나는 광화문과 전국의 광장의 촛불이 몇 개일지에 가슴 졸여야 했다.
2.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맞불집회에서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좌파들이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촛불과 탄핵을 비난했고, 같은당 이우현 의원은 “탄핵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며 “대통령에게 칼을 꽂은 의원들은 당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박근혜·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을 국정조사해야 할 국회, 청문회 위원인 새누리당의 이완영·이만희 의원이 청문회 증인측과 사전 접촉해서 태블릿PC가 최순실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하도록 했다는 폭로가 나오고 있다. 심판받아야 할 자가 심판을 말하고, 조사해야 할 자가 조사를 비웃고 있다. 탄핵으로 비난받아야 할 대통령 박근혜는 거짓이라고, 증거가 없다고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탄핵하는 답변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법치주의·민주공화국을 조롱하는 반동의 바람이 불고 있다. 촛불은 국가가 탄핵안을 발의했던 지난 3일 232만으로 타오르고서 숨고르기에 들어갔는데 심판받아야 할 자들은 반동의 맞바람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늘 이 나라의 광장은 촛불의 변혁과 헌법질서 탄핵의 보수, 그리고 맞불의 반동이 뒤섞여 회오리치고 있다.
3. 분명히 촛불은 거셌다. 주최자 퇴진행동조차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직된 몇 만이 아니고 조직되지 않은 몇 백만개의 촛불이었다. 퇴진행동은 촛불이 켜질 광장을 제공했다. 퇴진행동의 사회자가 선창했던 구호도 특정 계급계층의 요구가 아닌 국민 모두가, 심지어 박근혜에게 투표했었던 지지자조차도 따라 외칠 보수의 구호를 외쳐야 했다. 민주노총이 주도해 왔던 촛불집회의 구호가 아니었다. 광화문광장은 국민의 애창곡, 대중가수의 가요와 그 가사를 바꾼 노래가 울려 퍼졌다. 박근혜 퇴진하라고 <하야가>를 노래하고, 박근혜는 더는 용납할 수 없다고 <그네는 아니다>를 노래했다. <민중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탄핵소추 이후인 10일 촛불집회에서야 광화문광장 무대에 올려졌다. 분명히 조직된 백만의 대오가 아니었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하나의 구호로 자발적으로 집결한 촛불의 대오였다. 좌파들이 일으켰다는 말은 이 나라에서 좌파가 백만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좌파의 힘을 믿고 있다는 것인데, 이건 김진태의 착각이다.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더는 탄핵 절차를 기다릴 수 없다고 황교안 대행체제가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권이라고 선언한 지난 10일 탄핵소추에 폭죽으로 승리를 축하하지 않고, 17일 촛불집회는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하지 않고 곧장 국민들이 좌파의 촛불을 들고서 청와대를 불사르고 김진태 자신을 화형식에 올리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아니었다. 분노의 대상도, 광장의 구호와 노래도 좌파가 아닌 진보와 보수, 좌우를 가리지 않은 것, 그야말로 보수 우파조차 분노해서 외치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헌법과 국정을 농단한 민주공화국의 적, 박근혜의 퇴진이었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촛불은 거셌다. 그리고서 탄핵의 날이 왔다. 탄핵심판으로 박근혜를 퇴진시켜야 할 헌법재판소의 일을 국민이 지켜보는 날이 왔다. 전진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아직 분노의 촛불은 헌법재판소를 뛰어넘어 청와대를 불사를 정도로 거대한 높이로 타오르지 않고 있다.
4. 민주주의의 높이는 민주주의의 적에 대한 부정의 높이만큼이다. 민주주의의 절차가 문제다, 아니다 실질까지다. 일부 권력자의 부패다, 아니다 그 정파집단·세력이다, 아니다 지배계급이 문제다. 상부구조 정치의 문제다, 아니다 물적 토대·경제가 뿌리고 거기까지다. 국민을 대변할 대표를 세워야 한다, 아니다 그걸 넘어 국민이 스스로를 대표해야 한다. 선거권자로서 국민이냐, 아니다 주권자로서 국민이냐. 노동자는 국민의 이름에 파묻힐 것인가, 아니면 민주공화국에서 노동자권력 부문을 세워 내 확장할 것인가. 민주주의는 권력 국가부문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사업장까지 뻗칠 것인가. 짓밟힌 민주공화국을 어느 높이에서 세워 낼 것인지는 민주공화국의 적에 대한 분노한 행동의 높이에 달려 있다.
5. 노동자의 행동, 총파업이 있었다. 지난달 30일 민주노총의 총파업이었다. 촛불집회의 구호, 박근혜 퇴진에 더해 박근혜 정권의 성과퇴출제 등 노동개악 철폐를 외쳤다. 민주노총의 모든 조합원이 참여한 총파업투쟁은 아니었다. 촛불의 결의대로였다면 민주노총을 넘어 이 나라 노동자 대다수가 박근혜 권력 심판에 나서 세상을 멈춘 총파업이라야 했지만 아니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에선 조합원 과반수가 찬성하지 않아 파업이 부결됐다. 이렇게 부족할 수가 있는 노동자의 총파업투쟁이었지만 그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총파업의 구호, 박근혜 퇴진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파업투쟁에 나서지 않은 사정과 이유는 다양했다. 그것이 뭐라해도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총파업투쟁은 아직 박근혜 정권을 끝장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니 이 나라 노동운동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30일 이 나라 노동자가 분노의 걸음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날 이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로 이 민주주의운동에서 앞으로 어떻게 투쟁할 것인지로 이 나라 노동자운동은 평가될 것이다. 부결되고, 참여하지 못했다면 오랜 임단투 후유증일 수도 있고 파업 참여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할 정도로 분노가, 투쟁의지가 아직 높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이 민주주의투쟁에서 노동자의 정치의식이 광장의 분노를 넘어 총파업으로 나아가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이라도, 이 민주주의의 용광로로 끓어오르는 이 나라에서 당장 교육하고 행동에 나서게 할 일임을 말한다. 조합원의 정치의식의 후진성을 탓할 게 아니라 노조활동가 자신이 할 일을 하지 못했음을 탓할 일이다. 이번 투쟁은 너무 명확한 투쟁이다. 의문의 여지없는 투쟁이다. 민주주의자로서 노동자가 반드시 앞장서야 할 투쟁이다. 민주공화국에서 용서받지 못할 자에 대한 용서하지 않는 투쟁이다. 철저히 공화국을 무너뜨린 권력의 배신행위를 심판하는 일이다. 어디까지냐고? 끝까지 가면 결국 노동자를 복종시키는 노예제도의 뿌리가 드러난다. 굳이 수준 높은 노동자의 권리를 내세울 것도 없이 철저히 공화주의자로서 노동자가 그 적들을 분쇄하는 행동에 나서면 된다. 민주주의의 높이는 노동자까지도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 세우고 만다. 사실 지난달 30일은 거리와 광장의 투쟁을 총파업투쟁으로 전개한 날이었다. 민주주의투쟁을 노동자의 작업장과 삶의 투쟁으로 끌고 내려왔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기자는 언론사에서, 공무원은 국가와 지자체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전면적으로 반공화주의에 반대해서 해당부문의 반민주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하고, 그 반대투쟁해서 민주권력을 세우는 데까지는 아직 이 나라에서 투쟁은 전개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전근대적 노예질서를 거부하고 민주질서를 세우는 투쟁에 나서는 데까지는 아직은 아니다. 그러니 박근혜 퇴진투쟁에서 파업해야 할 이유를 아직은 이 나라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이 알고 나서도록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퇴진투쟁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자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6. 사실 파업은 소극적 저항이다. 적극적인 최고수준의 노동자 저항은 아니다. 적극적 저항은 주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복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국가부문에서, 작업장과 삶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자신을 부리는 사용자에 맞서 사용자와 대등한 주인으로 일하고 작업장에 민주질서를 세워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것이 노동자가 민주주의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자본을 대변하는 권력에 맞서 대표 권력이 아닌 스스로를 대변해서 행동하고, 소극적 저항 파업에서 나아가 주인으로서 행동하는 일, 사용자로부터 내려오는 지시가 아니라 노동자는 밑으로부터 세워 올라가는 민주질서를 세워 내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예 문서인 취업규칙이나 사용자의 명령 때문에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주인으로서 행동하면 주인의 질서가 열린다. 노동자가 주인으로 행동하면 작업장에서 민주질서, 노동자도 주인이 될 수 있다. 오늘 박근혜 퇴진투쟁은 선출된 권력 대통령의 퇴진을 헌법과 법이 정한 대로 국민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으로서 광장에서 자신의 행동으로 국민은 이 나라의 주인이 돼 박근혜를 심판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었다. 노동자를 복종시키는 근로계약 때문에 노동자가 노예인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스스로 주인으로 행동하면 주인이 된다. 그러니 오늘, 이 나라의 민주주의투쟁은 노동자 자신의 행동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디까지인지는 노동자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의 높이는 노동자 행동의 높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