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상생? 노사협력?

[노사상생? 노사협력?]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리 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와 사는 이익과 먹거리를 놓아 두고 다투어야 하는 앙숙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상생과 협력을 얘기 한다는 것은 사측의 사기요 기만인 것이다.

 

사측은 육식동물의 속성을 갖고 있고, 노측은 초식동물의 속성을 갖고 있다. 생각해보자! 사자가 물소를 찾아 와 상생하고 협력하자고 한다면 말이 되는가? 그나마 사람은 법이라는 게 있어 당장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더 잔인하게 죽도록 일을 부려 먹으며 죽어가게 할 것이다. 법을 피하면서 이익은 이익대로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노는 사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투쟁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투쟁을 통한 상생, 투쟁을 통한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은 사측과의 대화를 위한 유일한 언어일 것이다.

 

노와 사는 하나다! 우리는 하나! 이런 구호도 들어 봤다! 하지만 이런 말은 사측에선 말 하지 않는다. 어용 또는 개념이 없는 노측에서 하는 얘기이다.

찾아 온 사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물소가 우리는 하나라 하면 하나가 되는가? 그것은 물소가 죽어 사자 배 속에 들어가야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앙숙의 관계를 익히 갈파한 게 바로 유럽의 노동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혁명을 통해서만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자본가들의 행태가 짐승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노동자들은 혁명의 시동을 걸었고 많은 피도 흘렸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며 복지 중심의 사회, 노와 사의 힘의 균형이 법으로 확실하게 보장이 되는 사회와 정치 구조를 이룬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노와 사의 관계는 투쟁이라는 언어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과거 유럽 자본주의의 초기 수준인 원시적이며 야수적인 말기적 증상의 천민 자본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안타깝다. 그 한가운데에 kt가 있다.

 

노조가 풀을 버리고 고기를 주식으로 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노가 아닌 것이다. 사측인 것이다.

 

일제시대 때 독립투사를 고문한 사람은 전부 친일파 조선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은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안았다.

 

근본적으로 같이할 수 없는 관계, 그래서 오직 투쟁으로써 대화를 하는 사이 그 게 바로 노사 관계인 것이다.

 

노사 상생? 그것은 일생 수도하는 고승들이나 하는 얘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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