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원] “가족끼리 칼 들고 싸우는데 인터넷 설치한 적도 있죠”
작성자: 최종관리자 | 조회: 90회 | 작성: 2017년 6월 23일 10:52 오전“가족끼리 칼 들고 싸우는데 인터넷 설치한 적도 있죠”
김다혜 기자 입력 2017.06.23. 06:00 수정 2017.06.23. 06:10 댓글 809개
폭행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 인터넷 AS 기사들
“과도한 고객평가 부담 줄이고 안전장치 마련해야”
(서울=뉴스1) 김다혜 기자 = “저한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니까요.” “그 무모하고 안타까운 사건이 있던 현장에 아직 우리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충북 충주에서 근무하던 인터넷 AS 기사 A씨(52)가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며 흉기를 휘두른 고객에 의해 숨졌다. 22일 오후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열린 추모제에서 동료들은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와 KT민주동지회 등은 이날 오후 7시30분쯤 A씨가 근무하던 인터넷 AS 업체의 모회사인 KT 광화문 사옥 앞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제를 열었다.
이날 추모제에 모인 사람들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실적과 이윤을 우선하는 사회에서 이같은 비극의 발생은 우연이 아니라고 밝혔다.
정연용 KT민주동지회 사무국장은 “A씨는 고객의 특성을 모른 채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일했지만 위기상황에 대처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며 “업무 지시를 내렸던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안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고객의 집을 방문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설치·AS 기사들은 늘 위협에 노출돼 있다고 호소했다.
서비스를 해지한 고객의 집에서 통신설비를 회수하는 일을 하는 이경민씨(44)는 얼마 전 고객에게 폭언을 들었다. 이씨는 “요청을 받고 갔는데 컴퓨터 앞에서 밥을 먹던 고객이 ‘왜 밥을 먹을 때 오느냐’며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다”며 “며칠 뒤 A씨 얘기를 접했는데 남 일 같지 않았다”고 전했다.
인터넷 설치 업무를 하는 최영열씨(44)도 “가족끼리 칼을 들고 싸우는 와중에 저에게 인터넷을 설치하라 말라 하는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며 “최근 한 동료는 고객으로부터 ‘면상 좀 쳐보게 잔말 말고 와서 설치하라’는 말을 듣고도 고객을 찾아가야 했다”고 말했다.
손일곤 KT새노조 사무국장은 “요즘은 특히 날씨가 매우 더워서 사전에 통화할 때 고객이 조금만 짜증스럽거나 격하게 얘기해도 방문하기가 겁난다”며 “고객의 욕설이나 폭행 위협을 회사에 보고해도 소주 한잔 먹고 풀어라, 속으로 삭히라며 넘어간다”고 토로했다.
현장 서비스 노동자들은 다시 A씨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과도한 고객평가 부담을 줄이고 노동자의 재량권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인 개선 조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대부분 인터넷·통신 업체들은 고객이 방문 기사의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를 별점으로 매기거나 전화 등으로 평가하게 하는 고객만족도 조사를 실시해 업무평가에 반영하고 있다.
최영열씨는 “고객의 요구를 거부하면 시말서를 쓰거나 징계·교육을 받다 보니 고객을 찾아가 사과하는 게 비일비재하다”며 “기사들이 위협적인 상황에도 대항할 수 없는 채 현장에 방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손일곤씨도 “KT의 경우 기관장들이 고객만족도 지표에 따라 평가받는다”며 “현장 노동자를 고객에게 민원전화가 걸려오지 않게 모든 것을 다 감내하는 도구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위협을 느꼈을 때 스스로 서비스를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선조치 후보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A씨 사건과 같은 비극을 잉태하는 사회적 구조와 풍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박철우 KT 전국민주동지회 의장은 “2014년 8300여명의 KT직원이 명예퇴직했고 그 자리는 비정규직·하청업체 직원들이 메웠다”며 “비정규직은 정규직 노동자보다 노조를 만들기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안전을 지키기도 더 힘들다”고 지적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직장인 이해인씨(54·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등 구성원을 나누고 밀어내는 구조 속에서 일부 노동자들이 도구로 취급되고 결국 사람들이 분노를 마구 쏟아낼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dh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