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무엇을 위한 재벌 개혁인가? 75호 [ 2012-02-18 ]
작성자: 최종관리자 | 조회: 3024회 | 작성: 2012년 6월 7일 10:45 오후<레프트21> 75호 | 발행 2012-02-18 | 입력 2012-02-16
최근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그리고 일부 진보단체들도 이 쟁점을 부각시킨다. 새누리당마저 재벌 때리기 시늉을 하며 이 분위기에 올라타려 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재벌에게 느끼는 분노에 공감한다. 그러나 재벌 개혁론이 가리키는 방향과 대안은 우려스럽다.
재벌개혁론은 주로 재벌의 소유 구조를 문제삼는다. ‘문어발’을 넘어 ‘지네발’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재벌을 가능한 낱개의 기업으로 떼어 놓자는 것이다. 그룹 경영이 아니라 개별 회사의 주주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2010년 9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등 대기업 대표들과 이명박의 조찬 간담회 강력한 노동자 투쟁을 통해서만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재벌에 제대로 맞설 수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그러나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재벌보다 주주 중심 기업이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 재벌개혁론자들은 민영화된 KT를 모범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KT는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느라 몇 년 만에 노동자를 무려 3만 명이나 해고했고,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실적 압박 때문에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졌다.
재벌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이런 노동계급의 관점은 빼놓은 채 더 경쟁력 있는 기업 모델만 제시하려 한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도 ‘재벌개혁 로드맵’을 발표하며 그 효과로 “기업 경쟁력 강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 서다 보면 재벌 기업의 노동자 공격에 재대로 맞서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IMF 때 김대중 정권이 ‘재벌 해체’를 내걸고 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할 때 많은 재벌개혁론자들은 그것이 낳는 노동자 공격에 일관되게 맞서지 못했다.
유토피아적
게다가 재벌개혁론은 공상적이기도 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소수에게 자본이 집중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성과 같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 동력이 “자본의 집중과 집적”을 낳는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세계 15대 기업의 수입을 합한 것이 1백20개 나라의 수입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그래서 재벌 개혁이 경제적 집중도를 완화시킨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일본도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재벌을 해체했지만 곧 새로운 집중 현상이 나타났고, 새로운 형태의 기업 집단이 등장했다.
그래서 재벌개혁론은 자본의 집중을 해소하기보다는 흔히 자본 내 다른 분파를 지원하자는 생각으로 연결됐다. 예를 들어 1997년 경제 위기 때 김대중 정부는 재벌개혁론을 활용해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을 더 쉽게 소유할 수 있게 한 IMF의 방안을 밀어붙였다.
최근의 재벌개혁론은 주로 중소자본가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또 개혁주의 정치인들은 자본가 내 일부 세력과 연대해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재벌개혁론을 야권연대의 핵심 의제로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주들의 이해관계는 노동자의 이익과 충돌한다. 중소기업주들은 재벌ㆍ대기업과 갈등하기도 하지만, 재벌과 함께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해 열악한 조건에서 착취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복지 확대,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중적 불만과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재벌개혁론은 진정한 문제를 가리는 구실도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알맹이 없는 재벌개혁론에 휘말릴 게 아니라 재벌ㆍ대기업에 맞선 노동자 투쟁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의 집중이 낳는 모순된 효과를 봐야 한다. 자본의 집중은 노동자들도 집중시킨다. 노동자들이 단결해 싸운다면 재벌 체제의 심장부를 움켜쥐며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해마다 현대차 노조의 파업 여부에 지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따라서 우리는 재벌ㆍ대기업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성취하도록 고무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런 투쟁의 성과는 비정규직과 사회의 다른 부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국가가 나서서 재벌에게 증세를 하고 그 돈으로 복지를 확대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통신ㆍ에너지ㆍ금융 등 공공적 성격이 큰 부문은 재벌의 돈줄로 놔두지 말고 국유화해야 한다. 통합진보당도 강령에서 ‘국가 기간산업 국공유화’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런 과제를 달성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체제를 뒤흔드는 거대한 대중투쟁을 통해서만 재벌ㆍ정부한테 이런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노동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이 생산수단과 국가 권력을 직접 소유ㆍ통제하는 사회 건설로 나가야 한다. 그런 사회를 통해 진정한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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