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 흥하고 탐욕으로 망한다.’ 욕망은 내(기업)가 잘살기 위해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여기에는 내 가치사슬상의 이해관계자와 공생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반면에 탐욕은 욕망이 지나쳐 내 가치사슬상의 이해관계자의 몫을 뺏는 것은 물론 그 결과물로 사적 욕심을 채우는 일이다.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욕망은 자극시키되 탐욕은 억제시키는 경계선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국가 간의 전쟁, 국가 내에서의 정권교체, 기업의 흥망성쇠도 이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일어난다. 그래서 누군가가 균형을 유지시켜 줘야 하는데 현대에 들어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ESG 평가’다.
ESG 평가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ESG의 등장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불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언어를 사용하면서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생산성의 증가는 지배·피지배 계급의 분화를 야기했고 국지적 공동체를 넘어 국가라는 정치체제를 등장시켰다. 국가 지도자는 체제 안정을 위해 내부 자원을 적절하게 관리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게 된다. 그런데 내부의 생산성이 향상되면 될수록 체제 유지를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생산성이 필요해졌다. 이는 필연적으로 더 좋은 생산요소를 구하기 위해 확장을 하게 되고, 그 방법은 전쟁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의 배경이 그러했고, 1차·2차 세계대전의 뿌리도 이러한 생산성 향상 경쟁이 초래한 비극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집단
이러한 생산성 향상의 외연 확장(세계화) 과정에서 일어난 혁명이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다. 그런데 이 산업혁명이 그 전의 혁명과 다른 점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을 생성시켰다는 점이다. 이런 관계로 이때부터의 시대를 자본주의 시대로 부른다. 돈(資)을 근본(本)으로 섬기는(主義) 시대가 되었다.
때마침 프로테스탄티즘(칼뱅주의)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의 동기를 미덕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모든 거래는 돈으로 이루어지고, 기업 행위의 판단 기준은 ‘이윤’이 되었다. 필요한 노동력은 고통을 수반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원되었다. 양털 가격이 오르자 농지를 가진 영주는 양을 키우기 위해 울타리(enclosure)를 쳤고,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자본과 시장의 확대는 높은 생산성(량)을 요구했고, 이는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을 요구했다. 이에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필망을 역설하고 철학과 논리를 제시했지만 세상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세계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킬링필드가 일어났지만 그 시스템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나온 제도 중 가장 선진적인 제도가 되었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많은 불합리성을 극복하고자 전복이 시도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안적 시도가 인간이 가진 ‘의식주+α’의 욕망을 채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해 스스로 움직여 주는 기업이 없었다. 많이 부족하고 더디지만 자본주의는 기업이라는 행동 주체가 있어서 스스로 진화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듯 기업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해 가고 있는 집단이다. 그리고 그 기업 종사자는 다양한 가치사슬에 소속되어 타인의 욕망을 채워 주는 상품(서비스) 생산자이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하는 소비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자본주의(기업)에 어떤 기준으로 ESG 평가를 해야 할 것인가. 중요한 기준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가지면서도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진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ESG 경영을 가장 먼저 주장하고 나온 곳은 선진국 금융자본가들이다. 그들 나라는 다른 나라들보다 환경(E) 경영에 앞서 있고, 주식회사의 긴 역사 속에서 거버넌스(G)의 합리성을 높였고, 사회안전망(S)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금융자본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인데 현재 여기에 가장 위협적인 요인이 지구온난화다. 화석연료 사용의 피해는 자국 내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의 기후를 흔들어 버린다. 따라서 금융자본가들이 주도하는 평가 항목들도 환경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로서는 자본의 국제 유동성과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화, 그리고 지구온난화 피해의 전 세계성으로 인해 이러한 평가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분별력도 없고 울림도 없는 평가
하지만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ESG 평가가 전혀 분별력도 없고 울림도 없다는 점이다. 평가 대응 능력이 있는 대기업은 워싱(위장)을 잘하고 있고, 중소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돈 속에 있다. 또한 금융자본의 특성상 비재무사항을 무조건 재무사항화(계량화)하다 보니 모든 평가는 점수화되고 결과는 서열화된다. 그렇지만 분별력이 없다 보니 페널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ESG 경영이 유행하기 전에는 모든 기업들이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환경 이슈에 적극 대비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민단체(watchdog)들이 역동성 있게 활동하다 보니 기업도 감독기관도 긴장을 했다. 나름대로 욕망은 자극시키되 탐욕은 억제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요즘 ESG 평가는 모든 사항의 계량화와 서열화로 핵심 이슈를 종합 점수 속에 묻히게 했다. 예를 들어 사회적 가치 기준이 오염물질 배출 축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ESG 경영을 종합 점수로 평가받게 되니 오히려 기업의 이런 주요 이슈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마치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성차별, 장애인 고용, 비정규직, 중대재해, 이사회의 거수기화 등 핵심 이슈들이 n분의 1로 변해 버린 것이다. 또한 평가가 시계열 연속성도 없이 단발성이다 보니 개선에 대한 필요성도 못 느끼게 된다. 이러한 ESG 평가는 기업의 탐욕을 견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가치 지향과도 어긋난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퇴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