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모 KT 대표가 여권의 사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연임을 포기했다. 외부 경쟁자를 참여케 해 차기 대표 선출 절차를 원점으로 돌렸지만, 정부·여당의 냉담한 반응이 가라앉지 않아서다. 경쟁을 통해 연임에 성공해도 규제산업인 통신 시장의 특성상 정부와 척을 지기 어렵다. 또 사정기관들이 일제히 구 대표 주변의 비리첩보 수집에 나선 사실도 부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구 대표는 23일 이사회에 차기 대표 후보에서 사퇴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사회는 구 대표의 결정을 수용해 대표 후보군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KT 관계자는 “구 대표는 오는 3월 정기 주주총회를 끝으로 KT 대표직을 마무리할 예정”이라며 “현재 진행 중인 차기 대표 선임 절차는 계속 이어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앞서 KT는 구 대표 연임을 결정했던 차기 대표 공모 절차를 원점으로 돌렸다. 정부·여당이 “밀실 담합”이라고 압박하자 ‘공개경쟁 방식’으로 다시 후보를 뽑기로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 대표는 새로 시작된 대표 선출 절차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구 대표는 “공개경쟁을 통해 투명성과 객관성을 증진하길 기대한다”며 “KT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불식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 대표는 주변에 지배구조 불확실성이 길어지면 회사 경영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사퇴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차기 대표 선출을 앞두고 KT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비등하다. 이 때문에 최고재무책임자(CFO)가 투자자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주가 부양은 구 대표 재임 기간 최대 업적인데 연임의 기본 토대가 흔들린 셈이다.
재계에서는 구 대표가 자신을 향한 여권의 반대 여론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연임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 경찰,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구 대표 재임 중 있었던 각종 비리첩보 수집 등에 나섰다. 회사 바깥에서는 이 같은 점을 들어 구 대표 연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또 연임에 성공해도 최대주주(지분율 10.13%)인 국민연금의 찬성표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찌감치 국민연금은 구 대표 연임 시 주총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가세해 국민연금에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주문했다.
일설에는 새로 시작된 신임 대표 선출 과정에서 구 대표의 결격 사유가 부각됐다는 얘기도 있다. 구 대표는 KT 전·현직 경영진의 여야 국회의원 불법 후원 사건에 연루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구 대표가 빠진 차기 대표 레이스는 KT 전·현직 임원, 전직 관료, 국회의원들 간의 경쟁이 됐다. 지난 10일부터 20일까지 진행한 대표 공개경쟁 모집 결과 사외 18명, 사내 16명 등 구 대표를 포함해 총 34명의 후보가 몰렸다.
KT는 이달 28일까지 이사회 내 지배구조위원회를 통해 대표 후보 심사 대상자들을 압축해 선정한다. 이어 대표이사후보심사위원회의 면접 심사를 거쳐 다음달 7일 최종 후보를 확정한다. 회사 안팎에서 거론되는 유력 후보는 대체로 KT 출신으로 윤경림 트랜스포메이션부문장(사장), 박윤영 전 기업부문장(사장), 윤종록 전 미래창조과학부 제2차관, 김기열 전 KTF 경영지원부문장(부사장) 등이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