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이제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은 없다
작성자: 최종관리자 | 조회: 183회 | 작성: 2016년 10월 3일 7:32 오전[사유와 성찰]이제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은 없다
김인국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늙은 농부가 죽었는데 전운이 감돈다. 주검을 지키려는 이들과 빼앗으려는 자들 사이에 전선이 그어졌다. 그가 죽은 게 아니라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죽인 자들은 농부가 죽게 된 진짜 이유를 밝혀주겠다며 부검영장을 흔들어 댄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 있을까? 분이 치밀어 오르지만 저들의 체질과 본성을 감안하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패륜이다. 그 옛날 예수가 죽던 날에도 군인들은 창을 들어 옆구리를 푹 찔렀다. 농부의 그곳도 가만 놔두지 않을 테지만 칼을 든 자들이여, 이번만은 조심할지어다.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는데, 농부의 옆구리에서 또 무엇이 쏟아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농부를 빼앗긴 자들은 그것을 양식 삼아 반격에 나설 것이다.
보성 사람 백남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지당한 일이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과 너무나 닮았다. 천주교인인 그의 본명(세례명)은 예수의 다른 이름이었던 ‘임마누엘’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 그러니까 그는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과 다스리심을 드러내는 자. 임마누엘이 곁에 있으면 누구나 위안과 존중, 보호를 받는다. 예수는 “나를 본 사람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뜻밖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살짝 웃고 있는 농부의 영정에서 우리는 시방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예수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백남기는 명동 언덕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아예 머리에 물대포를 맞았다. 예수는 죽기 직전 “나를 먹고 나를 마셔라” 하면서 세상을 위한 밥이 되었다. 한평생 농민으로 살면서 세상이 먹을 밥을 짓던 선생은 밀밭에 한가득 씨앗을 뿌려놓고 최후의 순례를 떠났다.
두 분 모두 변방의 변두리 시골사람으로서 예수는 수도 예루살렘에 갔다가 못에 찔렸고, 백남기는 수도 서울에 올라갔다가 두개골이 깨졌다.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와 대사제 가야파의 미움을 사서, 백남기는 대통령과 치안책임자의 분노를 사서 죽었다. 아버지 헤로데가 잡다 놓친 예수를 결국 아들 헤로데가 잡았다. 청년 시절 백남기는 독재자 박정희에게 쫓기고 시달리며 살았는데 하필 그의 딸에게 붙들려 숨졌다.
예수가 죽자 그를 사랑하던 여자들이 대성통곡했고, 도망쳤던 남자들은 땅을 쳤다. 백남기의 사망에 온 나라의 ‘도라지와 민주화’들이 밤낮으로 울고 있다. 꼭 닮은 운명이 이 정도로 그치고 말까? 예수의 몸은 죽었어도 오랜 시간 빌라도의 소유물이었다가 나중에 돌려받았으니, 농부의 시신 또한 권력자의 손에 들려 너덜너덜해진 다음에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길 것이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통치세력은 자기들이 죽이려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 나라의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손에 맞아죽은 농부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서서 그가 참으로 누구였는지 묻고 답할 수밖에.
농부는 누구인가? 닭이 달걀, 닭의 알을 낳듯 농부는 쌀알을 낳아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알을 꼭꼭 씹어 먹으면 놀랍게도 살이 된다. 쌀, 살, 알, 세 낱말이 엇비슷한 것은 이런 연유다. 자고로 농부란 겨레의 어머니시다. 농부가 낳아주시는 쌀알로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우리는 새 기운을 얻는다. 농부, 이 어마어마한 이름을 예수는 하느님께 드렸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복음 15장 1절) 그러므로 그날 물대포가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타격했던 대상은 한낱 농사꾼이 아니었다. 우리를 모시고, 살리고, 키워주던 신적 존재였다.
성경은 예수가 죽던 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남기가 죽은 몸이나 다름없게 되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지진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나간 충격의 여진인지 앞으로 닥칠 재앙의 전조인지 따지느라 전전긍긍한다마는, 그 전에 절대로 없어져서는 안될 사람들을 없애버린 저 잔혹한 범죄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점부터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던 순간, 하늘이 활짝 열렸다. 성경의 개천절이라고 부를 만한 그날, 하늘로부터 이런 소식이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코복음 1장 11절) 개천절은 우리 서로 이런 소리를 들려주는 기쁜 날이어야 한다.
그런데 누구보다 먼저 그런 인사를 받으셔야 할, 죽는 날까지 옆구리에서 쌀알을 쏟아주시던 농부는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고, 제 혈육과 나눠먹지 않는 쌀은 산더미처럼 쌓인 채 몇 년째 썩어가고 있다. 하느님도, 하늘도 다 죽여놓고 이 나라는 이렇게 개천절을 맞는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302042005&code=990100#csidxc973220eaa024aba3e43d59573d70f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