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 KT·보험사·두산모트롤 노동자가 겪은 퇴출 프로그램 백태

[심층기획-우리는 저성과자였다] "공정인사라고요? 인격 살인 프로그램이에요"

KT·보험사·두산모트롤 노동자가 겪은 퇴출 프로그램 백태

매일노동뉴스 승인 2016.4.12.
 
▲ KT 노동자들이 광화문사옥 앞에서 쉬운 해고 KT사례 전시회를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올해 1월 공정인사(일반해고) 지침을 발표한 고용노동부의 행보가 발 빠르다. 3월에 권역별로 능력중심 인력운영 지원단을 설치하더니, 지난 8일에는 일반해고 제도를 도입한 IBK투자증권을 모범사례로 치켜세웠다.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의 제명을 받으면서까지 노조가 일반해고 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는 유독 '공정인사 지침'이 '노동자 갱생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한다. 성과가 낮은 직원에게 직무교육을 시키고, 이들이 회사에 보탬이 되는 직원으로 되돌아오도록 돕는 제도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광고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반복 재생된다.

현실은 어떨까. 현장에서 일찍이 저성과자 프로그램을 겪은 노동자들을 수소문해 만났다. 전직 KT 노동자부터 두산모트롤 노동자, 이름을 밝힐 수 없다던 보험사 노동자까지 여럿이다. 정부가 현장에 정착시키려는 성과주의 인사문화의 민낯은 괴기스러웠다. 노동자들은 '공정인사' 프로그램을 "인격 살인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했다. <매일노동뉴스>가 퇴출 프로그램을 경험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편집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결승점을 통과했다. 완주기념 메달에 가족 얼굴이 아른거렸다. 틈이 나면 절을 찾았다. 대웅전 불상에 머리를 조아렸다. 불경을 염송했다. 화를 삭였다.

“이제 그만 회사에서 나가라”는 압박을, 스트레스를 견뎌야 했다. 맨홀에 들어가 곡괭이 질을 하려면, 휴대전화를 많이 팔려면 체력을 길러야 했다. 그게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50대 중반 노동자는 이제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됐다.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

“죽지 않으려고 뛰었다” KT 노동자가 마라토너가 된 사연

2007년 12월 KT 동대구지사 산격지점에서 일하던 조재환(당시 나이 55세)씨는 안동지사로 발령났다. 발령에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2003년 12월 회사는 조씨를 부진인력(C-Player)으로 선정했다. 그때부터 계산하면 6번째 전환배치였다. 1년에 한 번꼴로 옮겨 다닌 것이다. 저성과자에게는 연고지에서 일할 권리조차 없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3년차 후배가 바로 안동지사장이었다. 처음에는 “행님(형님), 행님” 하면서 선배 대우를 했다. 물론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가 공인한 부진인력에게 호의를 베푸는 동료가 있겠는가.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은 일상이 됐다.

안동지사 서안동지점이 대구지역본부에서 판매실적 1위를 한 적이 있었다. 조씨는 팀장 지시로 우수사례 보고서를 작성해 지역본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조씨 인사고과만 D였다.

연차휴가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월초에 별말 없이 휴가신청서를 받았던 팀장이 갑자기 연차를 취소했다. 조씨가 신청한 휴가기간은 회사에서 전체 직원들에게 권고한 연차사용기간이었다. 그럼에도 조씨 연차만 취소됐다. “남만큼 열심히 일하라”는 게 팀장이 말한 이유였다.

휴가 때 대구 자택에서 고조모 제사를 모시려 했던 조씨는 난감해졌다. “팀장님은 제사도 안 지내냐”고 따졌다. 팀장은 “나는 365일 일한다”고 했다. 끝내 제사를 못 지냈다.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들딸 두 자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존심은 진작에 내다 버렸지요. 가족이 아니면 거기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지요.”

스트레스를 견디고 체력을 길러야 했다. 서점에 가서 안동지역 산을 소개한 책을 샀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은 산에 올랐다. 인근 사찰을 찾아 참선도 했다.

술을 줄였다. 대신 매일 아침 동네를 한 바퀴 뛰었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10킬로미터를 1시간5분에 완주했다. 태어나서 마라톤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안 그러면 죽겠더라고요. 아마 술 먹고 폐인이 됐겠지요.”

나는 그렇게 인사고과 D를 받았다

조재환씨는 인사·서무업무를 보는 사무직이었다. 2002년까지는 매년 인사고과에서 S등급을 받았다. 4급에서 3급으로 승진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만 50세가 된 2002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갑자기 상품판매 부서로 보내졌다. 처음으로 인사고과 D를 받았다. 나이가 많은 것이 죄라면 죄였다. 1년 뒤 회사는 그를 ‘부진인력’으로 낙인찍었다. 팀 판매실적이 저조하면, 조씨에게만 주의조치가 떨어졌다. 그가 외근을 나가면 2인1조로 감시하는 사람이 따라붙었다.

2년 뒤에는 기술 부서로 배치됐다. 이때부터 회사 관리자들은 조씨에게 명예퇴직을 신청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시험실에서 일했다. 얼마 안 가 전신주에 오르고 지하 맨홀에도 들어갔다. 전화·인터넷선을 가설하고 수리하는 일까지 했다.

“상품을 파는 일은 그래도 할 만했어요. 열심히 뛰어다니고 사람을 만나면 그만큼 팔렸으니까요. 인정받은 적은 없지만.”

하지만 기술 분야는 달랐다. 조씨는 기술도 없었고, 체력도 달렸다. 후배들을 보조하면서 눈치를 봤다. 인사고과는 무조건 D였다.

전적 거부했더니, 사택에서 내쫓고 퇴직 1년 전 동해바다 끝으로 발령

KT는 조씨가 나가기를 바랐다. 버티던 조씨에게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안동지사 근무 초기에는 사택도 배정되지 않았다. 며칠을 찜질방에서 보냈다. 어렵게 들어간 사택에서도 1년이 안 돼 나왔다. 회사는 “아파트 계약이 만료됐다”고 전했다. 거짓말이었다. 조씨와 동거하던 동료 직원은 계속 아파트에 살았다. 자회사로 옮기라는 회사 권고(?)를 거절한 직후 발생한 일이었다.

조씨는 비참해졌다. 안동지사로 옮긴 지 1년10개월 만인 2008년 9월 자회사로 가기로 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애초 자회사에서 2년간 고용이 보장될 것이라고 들었는데, 일할 기회는 1년뿐이었다.

퇴직을 거부했다. 그러자 회사는 행동으로 답했다. 또 사택을 배정하지 않았다. 두 달 새 팀을 두 번 옮겼다. 두 달 뒤에는 대구본부 최고의 오지, 경상북도 최북단에 있는 울진지사로 발령받았다. 정년퇴직 1년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회사는 조씨에게 기념패를 보냈다. 버리려 했지만 아내가 말렸다. 노조 조합비를 꼬박꼬박 냈는데 답례품은 없었다. 다른 퇴사 직원들에게는 감사패를 보내던 노조였다.

몇몇 후배들이 회사 인근 식당에서 조촐하게 송별회를 열었다. 상급자도, 노조 지부장도 참석하지 않았다. KT에서 부진인력은 그런 사람이었다.

전화국과 한국통신이 생기기 훨씬 전인 1971년부터 우체국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조재환씨. 2010년 6월 그렇게 39년 만에 회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받은 인사고과는 F였다.

“원래는 재경직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었어요. 그런데 인력이 부족한 우체국으로 발령하더라고요. 거부할 권한이 있었는데, 그렇게 안 한 게 후회됩니다.”

▲ 두산모트론 노동자 이아무개씨가 면벽수행을 했던 사무실. 금속노조
 

부당함 항의했더니, 지방근무 8년에 저성과자 교육 두 번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김현수(46·가명)씨. 22년간 일하면서 이른바 저성과자 교육을 두 번 받았다. 2012년에 한 번, 지난해 10~12월에 또 한 번.

상사에게 입바른 소리 한 게 원인이었다. “괜히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짚고 넘어갈 문제였다.

2004년 겪은 교통사고가 출발점이었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김씨는 피해자였다. 마침 회사 상해보험에 가입한 상태였다. 상사는 예상외로 "보험처리를 하지 말자"고 했다. “물리치료는 회사 의료복지제도를 이용하라”고 하면서.

김씨는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직원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다른 피해자들처럼 보험처리를 해 주세요. 그게 맞잖아요.”

그때부터 상사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김씨는 회사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금융감독원에 민원도 넣었다.

제대로 찍힌 김씨는 4년 뒤 서울에서 여수·순천지역으로 발령났다. 1년 뒤에는 부산으로 옮겼다. 중간에 잠깐 서울에서 몇 개월 근무한 것 외에는 쭉 부산에 있었다. A 또는 B를 오갔던 인사고과는 ‘무조건 D’로 바뀌었다.

지방으로 내려간 보험회사 직원인 김씨의 업무는 특이했다. 김씨는 “개별 소외업무”라고 불렀다. 해당 지점에서 김씨만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가 한 일은 대리점 개설 업무. 보험대리점을 하거나 할 계획이 있는 사업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우리 회사 보험상품을 팔아 달라”고 설득했다.

김씨의 회사는 메이저급이다. 굳이 영업하지 않아도 대리점을 하겠다는 사람이 널려 있다. 그가 만나야 할 대리점 영업주들은 김씨 회사가 마음에 안 들거나, 아니면 뚜렷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김씨 회사 상품을 취급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성과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김씨에게만 왜 그 업무를 맡겼을까. 게다가 정규직이 하는 업무가 아니었다.

“제가 아니면 그 업무를 할 수가 없대요. 세상에 그런 업무도 있나요? 인권 침해죠.”

김씨는 “처음부터 공정하게 평가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저성과자 교육 받고 3개월 만에 전환배치 “버텨야 회사가 바뀐다”

김현수씨는 가족이 있는 서울로 7년 만에 돌아왔다.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은 게 아니었다. 지난해 10~12월 받은 회사 저성과자 교육의 결과였다. 그에게는 두 번째 교육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동영상만 쳐다봤다. 일반적인 경영·회계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생들이나 받는 교육이었다. 7년 동안 대리점 개설업무를 한 김씨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직무와 관련한 교육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압박감만 준 거죠.”

형식적인 평가를 거쳤다. 짧디 짧은 교육과정을 무사히 수료했다.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김씨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전환배치를 당했다. 다행히 서울이었지만, 하는 일은 대리점 개설업무였다.

회사에 찍혀 지방생활을 하는 동안 변한 건 없었다. 승진 누락자라는 동료들의 시선과 자괴감, 7년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남았다. 신앙심 하나로 버텼다.

서울로 복귀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지금, 상사는 김씨에게 “조만간 다른 곳으로 전환배치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얼마나 더 돌아다녀야 할까.

김씨는 버티기로 했다.

“버텨야 ‘아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하고 회사가 다른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모두 나가 버리면 점점 심해지겠지요. 나중에는 회사가 기침만 해도 나갈 겁니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업들은 비용부담 때문에 저성과자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솎아 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며 “최소 1년간 직무교육을 한 뒤 종업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전직기회를 주는 독일 같은 선진국 기업을 따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기업은 현재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언론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