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소리] “피하는 게 능사는 아냐. 영혼이 있는 삶을 살고 싶어 노동운동 선택” 만민보 518번째 “KT민주동지회 엄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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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 집회에 직장동료들과 함께 참석한 엄장용씨
세월호 1주기 집회에 직장동료들과 함께 참석한 엄장용씨ⓒ제공: 인간다운 KT를 만드는 사람들

엄장용(50)씨는 KT에서 인터넷 설치기사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KT 회사와 노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KT 민주동지회’안에서 지역지부장 역할을 하고 있다.

KT 민주동지회는 1998년 와해된 민주노조 활동가들이 남아 만든 비공식적인 사내 단체다. KT 노조 조합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자체 후보를 내고 한 달에 한번 꼴로 광화문 KT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한다. 정규집회 외에 자신들이 속한 지사 앞에서 매일 1인 선전전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집회와 선전전의 주요 내용은 회사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 임금피크제 일방적 노사합의 같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회사와 노조집행부에 민주동지회 이름으로 항의를 한다.

홧김에 시작한 노조운동이 이젠 일상생활

엄씨는 전화개통기사로 1990년도에 입사했다. 교육기간을 거쳐 처음 발령받은 곳이 관악전화국이었다. 당시 관악전화국은 민주노조가 막 들어서려던 시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직장 내 권위의식이 강해 간부나 선배들의 막말, 폭행은 예사였거든. 근데 민주노조 추진하는 선배들과는 늘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좋았지.”

본래 반골기질이 있었는지 고분고분 직장을 다니던 엄씨는 언제부턴가 조장이나 대리 등 관리자들에게 불합리한 점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시작했다. 간부들과 마찰이 계속되다 99년 구로전화국으로 발령이 났다.

“관악 민주노조 선배들이 날 눈여겨보다가 구로 조직에 연락을 한 거야 ‘괜찮은 친구가 한 명 가니까 잘 설득해 보라’고. 나는 그때 의식이 있다기보다는 보복성 발령받고 날 지켜줄 방패막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지.”

성격상 조용히 살지는 못하겠고 노조 배경으로 불이익은 피해보자는 심정으로 ‘민주동지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팔자였는지 많은 동료들이 운동을 접는 와중에도 16년째 묵묵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피한다고 능사는 아닌데... 늘 안타까운 마음

KT는 2009년부터 이석채, 황창규 두 회장 시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경영효율화’ 명목으로 인력감축이 있었다. 이석채 시기는 약 6천 명, 황창규 시기는 8천 명 이상이 정리됐다.

“나간 사람은 나간 대로 힘들고 남아 있는 사람은 남은 대로 힘들지. 사람이 줄어드니까 업무량이 늘어나면서 과로사, 사고사가 자꾸 생기고 있거든.”

KT민주동지회의 집계에 의하면 2002년 민영화 이후 사망한 노동자는 근무 중 사망과 자살을 합쳐 260명이 넘는다.

“앞에서 나서다보면 물론 갖가지 불이익이 있지. 근데 가만히 있으면 또 만만히 보고 무시하고 정리당하고 그러거든. 그리고 소수니까 탄압을 하는 거지 다수일수록 찍어 누르기도 힘들어진다고.”

해고당하고 내몰리듯 자영업에 뛰어들다 빚더미에 앉은 동료들, 소처럼 일만하다 현장에서 쓰러지는 동료들 소식을 들으면 착잡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맘껏 싸워보기라도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지방 지부는 워낙 우리 회원 수가 적어서 왕따라든가 괴롭히기가 훨씬 쉬워. 그래서 지방근무하다 민주동지회 탈퇴하는 동료들에겐 나도 차마 뭐라고 못할 정도야. 근데 수도권 지부엔 최소 몇 명씩은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비교적 잘 버틴다고. 이것만 봐도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

역설적으로 정리해고의 바람이 불 때도 수도권에서 KT민주동지회원이 많은 지부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는 것이 엄씨의 주장이다.

“내가 볼 땐 노동자들이 연대만 잘되면 개개인들이 조금만 힘을 들여도 자본을 이길 것 같은데. 말로는 ‘회사가 변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면서도 귀찮고 겁이 나니까 나서지 않는 걸 보면 답답하지.”

나 홀로 칼퇴근 강행... 저녁이 있고 영혼이 있는 삶을 원해

엄씨의 근무철학은 ‘칼출근 칼퇴근’이다. 정규 출근시간이 아침 9시인데 조장이 8시에 회의를 소집하면 거의 참가를 안 한다.

“정규 근무시간이 9시 시작이면 9시부터 회의하고 끝나는 대로 현장에 가는 게 맞는 거잖아. 내 권익은 내가 알아서 지키자는 거야. 작은 싸움을 잘해야 큰 싸움도 잘한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엄씨는 작업준비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일찍 출근하는 경우는 있지만 오후 6시 퇴근 시간은 거의 지키는 편이다. 대부분의 직원이 8~9시를 넘어서도 근무를 하는데 혼자만 칼퇴근을 하니 실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대신 내가 맡은 고객은 한 명이라도 성심성의껏 관리한다고. 개통, 수리 건수 실적은 하위인데 고객평가가 항상 최상위권이야. 그래서 항상 중간 정도 근무평점은 유지하는 거지.”

엄씨가 노동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 같은 삶이 싫어서다. 한 번 그런 삶을 경험한 이상 힘들어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애들에게도 공부하라 소리는 안 해. 사람답게 사는 게 공부 잘하는 거랑은 별로 상관없다는 걸아니까. 애들이 아직 어리니까 아직 그런 얘기는 안 하는데, 커서 어떤 일을 하건 영혼이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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