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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나라도 없이 자랐지만 독립운동은 내 정체성”

안창호 선생 맏딸 안수산 여사, 이종걸 의원과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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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과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 독립운동사에서 족적을 남긴 두 선생의 후손이 광복 66주년을 앞두고 미국에서 만났다. 도산의 맏딸 안수산 여사(96·미국명 수잔 안·사진)와 우당의 손자 이종걸 민주당 의원(54)이다. 한·미과학기술대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이 의원이 지난 12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노스리지에 있는 안 여사의 자택으로 찾아가 이뤄진 대화였다.

도산과 우당은 생전에 두 번 만났다. 안 여사와 이 의원의 만남도 5년 전에 이어 두 번째다. 안 여사는 이 의원이 "저의 조부가 이회영 선생, 종조부가 이시영 선생"이라고 하자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정말로 이 선생의 손자냐"고 물었다. 우당과 도산의 후손이 세대를 이어 교류하는 셈이다.

대화는 자연스레 도산과 우당의 인연으로 시작됐다. 안 여사는 도산이 1907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우당과 '청년회'라는 비밀조직을 운영하고 이를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로 발전시킨 일을 떠올렸다. 1919년 3·1운동 후 임시정부 건설을 위해 국내외 활동가들이 모인 중국 상하이에서 도산과 우당은 재회했다. 이 의원은 우당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11년 4월 설립한 신흥무관학교가 올해 100년이 됐음을 설명했다.



안 여사는 집안에 간직하고 있던 현수막 하나를 꺼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주지역 동포들이 4월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한민족의 독립 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선포한 한인자유대회의 마지막 날 거리 행진에서 사용됐던 것이다. 한인대회는 서재필 박사가 주도했고, 당시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인 안창호 선생도 참석했다. 미국에서 신민회 회의를 할 때 'KOREAN INDEPENDENCE LEAGUE'라고 적힌 이 현수막을 펼쳐 놓았다.

안 여사는 "예전에 독립기념관에서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요청할 때도 현수막은 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수막은 안 여사에게 11세 때인 1926년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에 대한 상징적인 기억이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통해 본 독립운동은 '삶' 그 자체였다.




이종걸 = 안창호 선생의 안부가 늘 궁금하셨을 텐데.


안수산 = 아버지가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해라.
나는 조국을 위해 온 힘을 경주해야 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아버지답게 너를 대할 수가 없다'고
평소에 이야기하시곤 했어요.
 


이종걸 = 아버지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안수산 =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지 않은데 집에 오셨을 때 밤에 동화책을 읽어주시거나 역사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늘 회의하는 것을 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이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중요한 일을 하시고 몇 년 동안 집을 비우셔도 '그게 아버지 역할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종걸 =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을 듯합니다.

안수산 = 우리는 이해했습니다. 나라 없이 자라고, 아버지 없이 자란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생활할 때도 집이 국민회의 본부이자 신민회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회의도 많고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 개인 생활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불평 한마디 하는 것을 보질 못했어요.




이종걸 = 어린 나이에 성숙했던 것 같습니다.

안수산 = 미국에 있으면 내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이라서 내 정체성이 항상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의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도산의 장남 필립(1978년 작고)이 특히 그랬다. 사실상 가장이었다. 안 여사는 "오빠는 LA 다운타운에 있는 호텔에서 벨보이 같은 것을 하며 돈을 벌었고 흥사단 일도 했다"고 말했다. 필립은 권투선수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도산에 이어 흥사단 일을 맡은 송종익 선생(1887~1956)이 "일제와의 전쟁 준비를 위해 폭탄을 만들 때 쓸 수 있도록 화학공학을 배우라"고 말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안 여사는 샌디에이고 주립대를 졸업했다. 이후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해 비밀정보 분석가 등의 일을 했다.

안 여사는 "해군에 있을 때 해방을 맞았는데 주위에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서 "해방 소식을 접해 기뻤지만 그 감동을 제대로 나누질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해군에서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안 여사 가족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은 해방 18년 뒤인 1963년이었다. 도산의 장남 필립은 그보다 빠른 1958년에 한국에 갔지만 가족들은 그보다 늦었다.




이종걸 = 광복 이후 언제 한국을 가셨나요.

안수산 = 1958년쯤 (큰오빠) 필립만 한국에 갔어요. 나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초대해서 갔습니다. 이종걸 =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안수산 = 아버지를 죽인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됐다는 것이 어찌 큰 기쁨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1.이승만씨가 아버지 활동노선이 자신과 다르다고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했고
2.광복 후 임시정부 동지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이승만씨와 다른 동지들 간에 많은 갈등이 생긴 것을 비통하게 생각했습니다.
3.국민회의에서 임시정부로 부친 자금이 임시정부로 전달되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졌고
   그렇다면 그 돈을 독차지한 것은 한 사람뿐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이종걸 = 이승만 정권 때는 거리를 많이 두셨군요.


안수산 =



1.이승만씨가 독점해서 차지한 대한민국에 가봐야 공산주의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2. 이 박사 영향하에 있는 대한민국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우리 가족뿐 아니라
    미국에 있는 아버지 동지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안 여사는 5년 전보다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이종걸 의원)고 한다. 4시간가량 진행된 대화가 쉽지만은 않았을 터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안 여사는 영어와 '평양 사투리'를 섞어서 얘기했다. 도산 고향이 평남 강서여서 평양 말을 쓰는 것이다. 안 여사는 1915년생이라면서 "나 너무 늙었어"라며 웃기도 했다. 안 여사 기억이 흐릿한 일에는 옆에서 아들 필립 안 커디(66)가 거들었다.

이 의원은 안 여사에게 조부의 항일 발자취를 직접 더듬어가며 쓴 < 다시 그 경계에 서다 > 를 전했다. 안 여사는 자신의 회고록인 < 버드나무 그늘 아래 > 를 건넸다.

< 안홍욱 기자 ahn@kyunghyang.com >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의미있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 
나중에 좋아 보일 것 같아서 이길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