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딸들의 반란, 최초의 여성 노조지부장

 

1930년대 일본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였던 동양방적 인천공장에 뿌리를 둔 동일방직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섬유회사였다. 이 회사에는 일찍이 1946년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이었지만 1972년까지 23대에 걸친 역대 위원장은 모두 남성이었다. 1972년 5월10일의 동일방직 노조의 정기 대의원 대회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여성 후보인 주길자가 3회에 걸쳐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회사의 지원을 받는 남성 후보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지부장에 선출된 것이다. 당시 한국노총 산하 448개 지부의 조합원은 총 49만9천명으로 그중 여성은 12만4500명에 달했지만,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일방직은 조합원 1383명 가운데 1214명이 여성이었다. 동일방직 노조에서 여성 지부장이 출현한 이후 1974년에는 반도상사 부평공장 지부에서, 또 와이에이치(YH)무역 지부에서 여성 지부장이 배출되었다. 여성이 다수인 사업장에서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는 것은 지금에는 당연한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이 극히 미약했던 1970년대에는 하나의 사변이라 할 수 있었다. 주길자의 당선에는 조화순 목사가 이끈 산업선교회의 활동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 회사에서는 여성 집행부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지만, ‘얼마나 가나 보자’ 하는 분위기였지 꼭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길자는 이전 어용노조의 부녀부장이었지만, 지부장이 된 뒤에 노조비 지출 명세(내역)를 공개하고, 현장 활동을 강화하는 등 이전의 남성 지부장 집행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노조를 운영했다. 주길자 집행부의 출현은 중앙정보부의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노동자들을 통제해오던 한국노총 섬유연맹 체제에 균열을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회사나 남성 노동자들은 1975년 초의 선거에서 지부장 자리를 탈환하기를 원했으나, 여성 종업원의 생리휴가, 회사 창립기념일의 유급 휴일화, 기숙사 온수시설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주길자 집행부의 총무부장이었던 이영숙이 노조지부장에 선출되었다. 임기 3년의 지부장에 또다시 여성이 당선되자 회사와 남성 노동자들은 매년 선출하는 대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여성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노조 집행부를 교체하려 했다. 중앙정보부는 정부에 협력적인 한국노총의 통제를 벗어나는 민주적인 노조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회사와 남성 노동자들을 부추겨 이영숙 집행부를 와해시키려 했다. 1976년 7월23일 인천 동부경찰서에서 이영숙 지부장을 연행해 간 가운데 회사의 지원을 받은 남성 노동자들은 자파 대의원만으로 대의원 대회를 열어 현 집행부를 불신임하고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임했다. 회사 쪽은 조합원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기숙사 문에 못질을 했으나, 조합원들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등 기숙사를 빠져나와 농성에 들어갔다. 오후 2시 출근자들이 농성에 합세할 기미를 보이자 경찰은 이영숙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부장을 석방했다가 작업이 시작되자 이들을 다시 연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밤 10시 퇴근자들은 연행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밤샘농성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농성을 한 것이지 파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놈의 법(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그따위로 생겨 먹었는지 파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착한 노동자들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교대로 8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16시간을 농성하고 다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회사는 수도를 잠그고 전기를 끊고 화장실 문까지 잠가버렸다. 농성이 사흘째로 접어들자 더위와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그 상태로 법을 지킨다고 작업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은 “법이고 개나발”이고 가릴 것 없이 전면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노동자들이 어마어마한 ‘불법’을 저지르자 바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지금 우리야 너무나 닭장차와 전투경찰에 익숙해져 있지만, 이때만 해도 노동자들이 경찰과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어린 노동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남성중심 동일방직 어용노조에
여성 집행부가 들어서고
민주적 노조로 탈바꿈하자
회사·중정의 탄압이 시작됐다?
불법 파업으로 맞선 여성들은
알몸시위까지 하며 버텼지만
결과는 연행과 해고였다

절정은 1978년 똥물사건이었다
회사 지원을 받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똥물을 퍼부었고
팔짱끼고 지켜보던 경찰은 말했다
“이 쌍년아, 이따가 말릴 거야”

 

“옷을 벗자, 경찰들이 손을 못 대도록”

 

경찰은 한발 한발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섰다. 경찰은 “주동자만 내놓으세요. 주동자만 내놓으면 여러분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라며 노동자들을 회유했다. 노동자들은 “주동자가 따로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라며 맞섰다. 회사 간부들은 경찰에게 손가락으로 누구누구가 조합 간부이며 주동자라고 연행 대상자를 찍어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급박하게 소리쳤다. “옷을 벗자! 옷을 벗은 여자 몸에는 경찰이 손을 못 댄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 벌어졌다. 20대 초반이 대부분인 여성 노동자들이 수많은 경찰과 회사 간부들 앞에서 스스로 작업복을 벗어던진 것이다. 한 여성 노동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옷을 벗다니! 그것도 많은 남자들 앞에서!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끔찍하면서도 놀라울 뿐이다. 부끄러운 걸 따지자면 벗은 우리보다도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그놈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들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경찰은 속옷 바람으로 맞선 여성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끌어갔다. 노동자들이 끌려간 빈자리에는 벗어던진 작업복과 주인 모를 운동화, 작업모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소동으로 70여명의 노동자가 연행되었고, 40여명이 까무러쳤다. 두 사람은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중 한명은 오빠를 보면 경찰이라고 비명을 지르는 등 상태가 심해 5개월 뒤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동일방직은 당시 작업환경이 좋은 공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일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처음 공장에 가본 사람들은 공장의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운 정원 등 깨끗한 환경에 놀라지만,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먼저 후끈한 40도 열기에 숨이 막히게 되었다고 한다.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계 소리에 사람들은 고무로 된 귀마개를 끼고 있었고, 악을 써도 잘 안 들리기 때문에 호루라기를 불어 의사소통을 했고, 솜에서 나오는 자욱한 먼지가 눈과 코와 입으로 들어와 생지옥이 따로 없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하루 8시간 1일 3교대는 공부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인 듯싶지만, 그만큼 노동 강도가 셌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일방직 입사자들이 처음 받은 훈련은 1분에 140보라는 거의 뛰는 수준으로 기계 사이를 빨리빨리 돌아다니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성 지부장이 출현하고 남성 중심의 어용 노동조합이 여성 집행부가 주도하는 민주적인 노조로 탈바꿈하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여자도 능히 지부장 노릇을 할 수 있다, 아니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증명되었다. 여자들이 집행부가 되니까 먼저 생리휴가도 찾을 수 있고, 월차도 돈으로 주던 걸 찾을 수 있게 되고, 화장실도 조금은 자유롭게 가게 되고, 현장 관리자들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횡포 같은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식사 시간도 생기게 되고, 식당 메뉴도 달라지고, 노동자하고 사무원하고 식당이 따로 분리되었던 것도 하나로 통합되는 등 실생활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조합원들이 너나없이 노조 사무실로 달려와 옷을 벗어던지면서까지 처절하게 싸운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가져다준 지도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 대중운동사에 다시없는 눈물겨운 지도부 보위투쟁은 지금 우리에게 왜 민주정권이 실패했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가슴 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두 번째 여성 지부장인 이영숙이 1976년 12월26일 개인 사정으로 퇴사하여 새로이 집행부를 선출하게 되자 중앙정보부는 동일방직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 1977년 3월30일 선거에는 이영숙 집행부의 총무부장 이총각과 나체시위 당시에는 집행부 쪽이었지만, 그 후 입장을 바꿔 회사와 섬유노조 본부의 편에 선 문명순이 입후보했다. 남녀 대결이 아닌 여성 대 여성의 대결로 치러진 것이다. 이 선거에서 이총각이 승리하여 민주노조의 3기 집행부가 출범했다. 중앙정보부는 이총각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했고, 회사 쪽은 남자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 탈퇴공작을 벌였다.

 

한 여관방의 수상한 남자들 정체는?

 

끊임없이 자행되던 노조파괴 공작은 1978년 2월21일 대의원 대회가 예정된 날 똥물사건에서 절정을 이뤘다.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에 따르면, 새벽 6시 10분 전 남성 노동자 5~6인과 집행부와 대립했던 여성 조합원인 문명순, 박복례 등이 방화수 통에 인분을 담아 야간작업을 마친 조합원들이 투표 준비를 하고 있던 노조 사무실로 들이닥쳐 똥물을 뿌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비명을 지르는 여성 조합원들의 얼굴과 온몸에 바르고 입에 집어넣고, 옷 속에 집어넣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당시 노조에서는 불상사를 우려하여 경찰에 경비를 요청해 두었는데, 다급한 여자 조합원이 울먹이며 구원을 호소하자 경찰관은 “야 이 쌍년아 가만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라고 답했으며, 현장에 나와 있던 섬유노조 본조 간부들은 재미난 구경거리가 난 듯 낄낄댔다고 한다.

 

이 당시 중앙정보부 인천지부에서 노동문제를 담당하던 사람은 유신정권에 의해 고문살해 당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이었다. 1978년 초 인천지부에 부임한 그는 유신 철폐와 박정희 정권 타도만 요구하지 않는다면 일선 담당관 차원에서 최대한 도와주겠다며 이총각 집행부와 일종의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화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2월 초 최종선은 보안사 인천지부로부터 신포동 한 여관에 거동수상자 여럿이 집단으로 들락날락한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그가 현장에 가서 자신이 중정 인천 조정관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그들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했으나 그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선이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면 강제 구금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제야 그들은 “정말 우리가 누군지 몰라서 묻느냐”며 “위(중앙정보부 2국)에서 다 알고 있다”며 자신들은 동일방직 노조를 깨부수러 온 섬유노조 조직국장 우종환과 조직행동대장 맹원구라고 신원을 밝혔다는 것이다. 담당관도 모르는 사이에 본부에서 강경한 방침이 수립된 것이다. 결국 이들의 비호 아래 동일방직 남성 조합원들이 똥물을 뿌리고 섬유노조 본조가 파견한 조직행동대가 현장을 장악한 가운데, 민주노조 파괴 공작이 진행된 것이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는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결정하고 이총각 지부장 등 간부 4명을 반노동조합적 활동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명했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50여명은 3월10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근로자의 날 기념식이 전국에 티브이로 생중계될 때 일어나 “우린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이 얻어터지고 머리채를 휘어잡히며 구호를 외친 바람에 생중계는 세 차례나 중단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연행되었지만 연행을 면한 사람들은 명동성당으로 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단식농성 14일 만에 김수환 추기경 등의 중재로 농성을 풀고 회사로 복귀하기로 했으나, 회사는 오랜 단식으로 몸이 축난 노동자들이 회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굴욕적인 사실상의 노조탈퇴 각서를 요구하고 각서에 서명하지 않자 무단결근을 이유로 126명(2명은 자진퇴사)을 해고했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는 부서, 주민등록번호, 본적까지 기재한 동일방직 해고자 126명의 명단을 ‘업무 집행에 관한 참조사항’이란 문서로 만들어 이를 전국의 노조와 사업장에 배포했다. 이것이 이른바 ‘블랙리스트’의 시초였다. 블랙리스트는 돈을 벌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때 해고된 124명의 대부분은 1952년생인 박근혜 당선인과 1959년생인 필자 사이의 연배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똥물을 뒤집어쓰고 해고라는 청천벽력을 당한 그들은 다들 그때 죽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때 죽으려고 생각 안 했던 사람이 정상이 아니란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산업선교회 좁은 바닥에서 몇 년 동안 없는 살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니 팬티 내 팬티 없이 니 칫솔 내 칫솔 없이’ 살다 보니 ‘피와 살이 섞여’ 하나가 되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드디어 복직이 되나 보다 기뻐했던 그들은 아직 복직이 되지 못한 채 그들과 동년배인 박근혜, 그때 그들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잔인한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2013년은 그들이 해고된 때로부터 햇수로 일제시기와 맞먹는 36년이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러나 동일방직의 언니 누나들은 그 죽음의 세월에 맞서 여전히 꿋꿋이 싸우고 있다.

 

비록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살인정권의 탄압 아래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은 하나씩 깨져버렸지만, 이들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작은 승리의 축적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들은 비장하게도 ‘단 한번 승리’를 외치지만, 그 최후의 승리는 민중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작은 승리를 통하지 않고는 오지 않는 법이다.

 

80년대에 접어들자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젊은 지식인들은 70년대 여성노동자 중심으로 경공업 사업장에 건설된 개별기업 단위의 민주노조가 경제투쟁과 조합주의에 매몰되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분명 70년대의 노동자들은 유신헌법 철폐나 군부독재 타도와 같은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구호를 외쳐야만 정치투쟁인가? 유신체제의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과 복종을 강요당하던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행위였다. 당시의 여성노동자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조합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만 생각했다. 김진숙도 해고 통보를 받고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더니 그런 걸 유식한 말로 연좌농성이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누가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연대란 말은 몰라서 쓰지 않았지만, 다른 사업장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쫓아가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원풍모방처럼 노동자들이 일치되어 싸워서 좋은 노동조합을 이룩한 경우,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노동조합도 없는 어려운 사업장에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자신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끝내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탈바꿈하는 데 실패한 남영나이론의 김연자는 그때 자신들도 원풍과 같은 좋은 노조 가져 보는 게 꿈이었다면서, 그런 꿈을 가졌던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자신들을 조합주의자라 비판하던 자들이 지금 새누리당이나 박근혜 캠프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을 통렬히 비판했다.

 

자식은 기름밥 먹이지 않겠다는 모진 맹세 ??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연쇄반응의 처음을 장식한 와이에이치(YH)사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7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일상적인 모임이었던 목요기도회에서 전태일과 동일방직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가장 중심적인 주제였고, 구속자들의 가족 외에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종로 5가에 와 기도회의 자리를 메웠다. 이들이 노동자로서 우뚝 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한국 사회는 노동자들의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다른 방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평생을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자식을 키운 부모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사무직들에게 반말을 들으며 내 새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름밥 먹이지 않겠다고 모질게 맹세했다. 온 나라가 거국적으로 벌인 필사적인 노동탈출의 결과 그 꿈은 이루어졌고,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에서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어 고교졸업생의 거의 90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을 천시하다 못해 적대시하는 현실은 그냥 두고 개인적으로만 노동탈출을 시도한 결과는 어떠한가? 산업화 세력들이 말하는 선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차장은 안내양으로, 식모는 가정부로, 운전사는 기사로, 청소부가 미화원으로, 공고는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로, 공순이는 오퍼레이터로 바뀌었지만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때의 여성노동자들은 지금 잘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원풍은 지금도 200명 가까이 모이고, 동일방직도 100명 가까이 모인다. 청계피복의 지난번 모임에는 80여명이 나왔는데 아직도 평화시장 부근에서 미싱 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더러는 눈이 나빠져 더이상 미싱을 타지 못하고 건물 청소를 하며 먹고살고 있었다. 원풍에서도 남편 잘 만난 소수 빼고는 다 마트에서 식당에서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개중에는 드물게 새누리당 당원이 된 사람도 있지만, 다들 여전히 그때 노조 활동하던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미용실에서 4대강 사업 찬양하는 손님과 언쟁을 벌여 손님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얘기는 꼭 하고야 마는 것이 70년대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자식들은 대부분 대학생이 되었지만, 심야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해야 하고, 졸업해도 비정규직이라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가 민주화와 산업화라면 그 역사는 반드시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 성취의 진정한 주역은 박정희도 아니고 몇몇 이름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다. 그 당시 민중의 최전선을 지킨 것은 남성노동자들의 무쇠팔뚝이 아니라 가녀린 ‘공순이’들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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