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삼성에서노조를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었다”



나는 놀기 좋아하고 욕도 잘 하는 사람이다. 입사 6년차 때까지만 해도 노동자 권익이 뭔지 몰랐다. 삼성 특유의 경직된 조직 문화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평범한 사원이었다. 그런 내가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눈을 뜨게 된 때는 외환위기 직후였다. 2000년 어느 날 인사팀에서 전화를 해 직원을 한 명씩 불렀다. 면담을 다녀온 직원은 하나같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며칠 이어지니 다들 전화를 안 받으려고까지 했다. 인권·노동 등에 대해 몰라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노동부에 물어봤더니, 회사의 (사직) 권고를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사내에 노사협의회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이 내가 거기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야간대학에서 관광을 전공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노동법을 공부하며 2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선거를 노렸다.


회사 측의 회유와 방해 공작에 시달려


2002년 2월 처음 노사협의회 위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10명의 동의를 받아서 입후보서를 냈더니 과장이 전화를 했다. 대뜸 출마하지 말라고 했다. 이유를 따져 물으니 내가 남자라서 안 된다고 했다. 노사협의회 선거구가 9개인데, 우리 팀(F & B:Food and Beverage)만 TO가 두 명이었다. '조리'에서 남자, '홀'에서 여자가 나와야 하는데 여자가 나가야 할 홀 부문에서 내가 나온다니 출마하지 말라는 거였다. 초등학교 투표도 출마에 성별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과장에게 말했다. 그래서 에버랜드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노사협의회 경선이 열렸다. 그때 팀장이 직원을 한 명씩 불러 나를 찍지 말라고 했다.





ⓒ연합뉴스 7월13일 조장희 삼성노조 부위원장이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난관을 뚫고 당선했다. 처음에는 회의 시간도 인사팀이 언제 모이라고 하면 그때 모였다. 인사팀이 건넨 안건을 가지고 회의를 했다. 노사협의회는 근로자참여및협력증진에관한법률(근참법)을 기준으로 운영되는데, 규정이 틀린 부분이 많아서 개정도 요구하고 회의록도 만들자고 했다. 나를 뽑아준 사람들을 위해 의욕적으로 노사협의회 활동을 했다. 미리 직원들한테 회의 일정을 공지하고 요구 안건이 있으면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했는데 나중에는 반응이 좋았다.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안건 받고 그걸 잘 해결하면, '확실히 잘하네' '잘 뽑았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회사는 나를 싫어했다.

2004년, 2006년 선거에서도 당선했다. 그 사이 회사의 회유가 많았다. 지금까지 수고했으니 이만하고 '인사팀으로 와라' '총무업무 하면서 편안하게 대민업무 봐라'는 제안이었다. 거부했다. 처음에는 2년만 노사협의회 하고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2년 하면 많이는 못 바꿔도 좀 바뀌겠거니 했는데 속도가 너무 더뎠다. 그런데 또 아주 안 변하는 건 아니니깐 나도 모르게 계속 활동에 빠져들었다. 누구는 내게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가 달걀이고 누가 바위냐고 대꾸했다. 바뀔 것 같았다.

2008년 노사협의회 위원 4선 도전에서 떨어졌다. 회사 쪽에서 낸 사람 한 명과 나를 포함한 우리 쪽 두 명이 두 자리를 놓고 겨뤘다. 상대 쪽 후보와 우리 쪽 친구 한 명이 당선되었다. 표가 나뉘어서 우리 쪽 친구보다 한 표를 덜 얻은 내가 낙선했다.





7월18일 조장희 부위원장이 받은 해고통지서.

낙선하고 나서 2009년부터 노조를 준비했다. 동시에 2010년 노사협의회 선거도 준비했다. 2011년 7월부터 복수노조가 시행되니까, 그때까지 노사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정보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그런데 2010년 선거가 있는 해가 되자 회사는 나를 다른 팀으로 보냈다. 노사협의회 규정에 따르면, 그 팀에 간 지 1년이 넘은 사람만이 출마할 수 있었다. 내 출마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준비했던 대응책을 펼쳤다. 지난해 1월 '삼성에버랜드에 노조가 필요하다'라는 글을 사내 인트라넷에 띄웠다. 글은 올린 지 20분 만에 삭제되었다. 일부러 전화기를 꺼놓고 '반차'를 썼는데, 휴대전화를 켜보니 회사 측에서 문자와 전화가 70통 넘게 와 있었다. 대화하자는 내용이었다. 결국 회사가 내 발령을 번복했고 선거에 출마했다. 회사가 인력의 효율적 배치라는 명목으로 나와 친한 사람들을 다른 팀으로 보냈다. 나는 또 떨어졌다.

그때부터 노조 설립에 속도를 냈다. 이미 준비하던 것이었고, 사내에서도 '2011년 7월1일만 되면 조장희가 무조건 노조 만든다'라는 소문이 났다. 삼성노조 박원우 위원장, 백승진 사무국장, 김영태 회계감사 등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노조법 등에 관한 전문가 강의를 7~8주 코스로 계속 들었다. 지금 구체적으로 얘기 못하지만 우리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온 삼성 각 계열사 직원이 함께했다. 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부러워했다. 거기는 계열사마다 한 명씩인데, 우리는 4명이었다. 그때 노조 탄압 대응 매뉴얼도 만들었다. 매뉴얼 덕에 지난 7월7일 미행하는 차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차 번호를 기록하고 동영상을 찍었다. 가족 간에 우의를 다지는 것도 중요했다. 박 위원장과 김 회계감사는 에버랜드 사내 커플이다. 아이들 나이도 두 살부터 여섯 살까지 비슷해, 네 가족이 자주 모였다. 제주도·목포 등으로 여행도 가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해고를 당하니 이런 노력이 효과를 발휘했다. 요즘은 아내들이 더 의연하게 대처한다.


"창의적으로 기회 선점해 강한 노조 만들 것"


아무리 그래도 막상 일이 닥치니 힘들었다. 특히 '대포차'와 관련해서 삼성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걸 보면서 '벌써 시작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7월8일 오전 11시51분 연합뉴스에 '대기업 조 아무개씨'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다. 기사가 올라오자 20분 뒤에 지원 차장이 사람들을 불러 기사를 보라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파트장들에게 기사를 이메일로 보냈다. 또 일부 언론은 내 징계를 막기 위해 만든 '방탄 노조'라고 썼다. 그런 일을 겪으니 정신력이 강한 나도 한동안 잠이 잘 오지 않았다(삼성에버랜드는 조장희 부위원장의 해고가 노조 설립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회사는 임직원에 대한 개인정보나 거래 내역을 외부로 유출했을 뿐 아니라 대포차 관련 입건으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한 점을 해고 사유로 들었다).

삼성이 하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점이 너무 많지만, 대포차를 탔다는 점은 잘못했다. 그 부담으로 노조 창립총회 때 위원장 자리를 사양했다. 한 치 예상도 어긋나지 않고 삼성은 나를 도덕적으로 나쁜 놈으로 몰아붙여 노조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또 해고한 뒤 긴 소송으로 지치게 만들 거라는 예상도 했는데 삼성은 그대로 하고 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건희 회장이 강조하듯 '창의적으로 기회를 선점'해 더 강한 삼성노조로 거듭날 것이다(삼성 에버랜드 인사팀 관계자는 "복수노조 시대에 노조가 설립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번에 조장희씨 등이 설립한 노조는 직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조장희 구술 / 정리·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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