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에 있는 개들이 꼭 읽어야 할 글
작성자: 업보 | 조회: 5457회 | 작성: 2013년 5월 14일 12:36 오전 생각은 의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생각은 또한 의지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이자 의지라니. 당혹스럽겠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기득권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저건 아니지”라는 생각을 표현했다가는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는 생각을 쉽게 포기하는 쪽을 선택한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권력자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편이 일신의 안전에 훨씬 유리하다는 무의식적인 판단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짐승이 된다. 자신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만 하는 인간일 수 있다는 말인가.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안타까움에 탄식이 멈추지 않는다. 20세기 대부분을 우리는 생각의 권리를 허용하지 않았던 야만적인 권위주의의 지배에서 허덕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기를 어둡게 만들었던 일본 식민지 시기로도 모자랐던지, 20세기 후반기는 군사독재의 군홧발에 의해 더럽혀졌다. 힘이 모든 인간적 가치를 억압했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남루하고 서글픈 일이다. 그렇지만 모진 것이 삶인지, 암울했던 시대에도 삶은 지속되어야 했다. 20세기 전반기에 굴욕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둘 이 세상을 허무하게 떠났지만,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에 유년기나 청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이제 어느 사이엔가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개발독재의 추억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배를 곯지 않게 해준 아련한 전설로 남아있지만,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당시 대학을 다니면서 유신체제의 중심부에 들어가려 했으며, 마침내 그 뜻을 이룬 사람들이다.
지금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한 그들이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한 가지 치러야 할 치명적인 대가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과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독재체제의 정점에 있는 독재자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혼자서 판단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최고권력자의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전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의무와 의지를 관철하려는 민주시민의 태도이다. 그렇지만 독재체제의 권위주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대다수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보다는 독재자 일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출세의 관건이 된 것이다. 이렇게 유신시절 대학을 다니며 관계나 법조계에 들어갔던 젊은이들이 어느 새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 정부가 내각을 구성할 때 우리가 장관 후보자들의 비윤리성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청장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유신시절 사법시험을 보려 했던 사람들에게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어떤 윤리성을 바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시인 김남주도 말하지 않았던가.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서글픈 굴곡을 이처럼 갈파한 시가 또 있었던가.
개는 개밥을 주는 사람이 도둑인지 살인자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맛난 개밥을 주느냐의 여부다. 그래서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은 바로 그 주인이라고” 김남주 시인도 조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사람이 개일 수 있다는 말인가. 불행히도 독재시절의 입신양명은 스스로 개로서 살기로 작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만 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개로 자처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개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려고 버티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의 열등감 때문에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동료와 후배들을 보면 불쾌감, 아니 모욕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 “주인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면서 개밥을 챙겨왔던 사람들
주인 명령이 없을 때 그들에게 남는 것은
동물적인 쾌락과 향락, 그리고 권력욕뿐”
인간으로 혹은 민주시민으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사람들은 개가 되어버린 사람으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당당함은 개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자신이 지금 개로서 살고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타인이 자신의 처자식이거나 후배들이라면, 한마디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라면 그의 불쾌감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이런 불쾌감을 지우기 위해서일까. 개로 자처한 사람은 당당한 인간들을 모두 개로 만들려고 한다. 권력자에게 비굴한 사람들이 항상 자신의 후배들에게도 비굴함을 강요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자신만이 개로 전락할 수 없으니, 모든 사람들도 개로 전락해야만 한다는 식이다. 권력자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을까. 자신의 개가 모든 사람들을 개로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니 말이다.
최근 사회 지도층들의 후안무치와 안하무인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주인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면서 개밥을 챙겨왔던 사람들, 타인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각의 의무와 의지를 저버린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을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유신시절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유신시절을 거쳤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그들처럼 개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렇다.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정당한지,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반성해야만 했을 것을 반성하지 않아서, 생각해야만 했을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 그들은 지금 그 자리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의 명령이 없을 때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동물적인 쾌락과 향락, 그리고 누군가에게 군림하려는 권력욕뿐이다. 이미 머리는 권력자에게 넘겨주었으니 남은 것은 알량한 몸뚱이와 동물적 욕망일 수밖에. 여기서나마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개로서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 남루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떤 사람은 부동산 투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전입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접대에 몸을 맡기고, 어떤 사람은 성추행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개는 주인을 제외하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다. 온 시민에게 수치심을 심어준 사건에도 주인에게만 꼬리를 내리는 개들의 모습을 보라. 언제나 우리는 유신시절의 악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이런 개판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