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세 투사… 나이먹었다고 투쟁을 게을리하지 마세요

 



 


 


강우규 의사는 1859년 평안북도 덕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한 후에는 한약방을 차리고 한의사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동휘 선생과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있자 의사는 이미 50중반의 나이였으나 가산을 정리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의논합니다. 1915년부터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동포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건설하고 이곳에 동광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신한촌은 나중에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됩니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펼쳤고 그즈음 연해주로 가서 대한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강의사는 나이가 든 노인들도 독립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강의사는 그해 6월 25일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노인동맹단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독립 청원서 제출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회유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우기 위해 새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를 부임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 강의사는 자신이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러시안인으로부터 폭탄 하나를 구입합니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에 잠입한 강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환영 나온 인파들과 삼엄한 경계속에서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타려는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 64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안중근 20살, 윤봉길 24살, 이봉창 32살. 1960년 통계청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가 51.1세, 여자가 53.7세였으니 1919년 당시 환갑을 넘긴 64세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총독 암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9월 9일 LA TIMES에 실린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거 


 


강의사는 현장에서 몸을 피했으나 9월 17일 도피 15일 후에 가희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독립운동 탄압으로 유명한 악질 일제 고등계 형사인 김태석에게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강의사는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종일관 당당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강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변호사를 선임하자는 아들의 부탁에도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그의 유언에도 알 수 있듯이 강의사는 못다한 조선청년들의 교육을 아쉬워했습니다. 혼란한 시대속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조국의 미래인 청년들에게 일깨움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형 집행 전 간수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강의사는 짧은 시 한편을 남깁니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죄인들이 쓰던 용수를 쓰고 재판정에 출두하는 강우규 의사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운명을 마감합니다. 정부에서 1962년 의사의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구 서울역사 입구에 있는 강우규 의사 의거 기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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