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날조의 청부징계와 허수아비 징계위원들이 판치는 KT


 


 


【서울=뉴시스】김종민 기자 = 헌정사상 '사법살인'의 첫 희생자로 꼽히는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이 사형 집행 52년만인 20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898년 인천 출신의 죽산은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했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7년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이후 죽산은 ML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해방 뒤 죽산은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공식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죽산은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고,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해 성사시켰다.

농지개혁으로 국민적 지지가 높아진 죽산은 제2·3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30%의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켰으나 부정선거 의혹 등으로 결국 낙선했다.

문제는 부패로 민심을 잃은 이승만 정권에게 죽산이 가장 큰 위협이었던 것. 결국 죽산은 1958년 1월 간첩 혐의로 전격 구속된다.

당시 검찰은 죽산에게 간첩 양명산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 등을 적용해 기소했고, 1심 재판부는 같은해 7월 간첩혐의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은 즉각 항소하면서 죽산의 변호인단을 구속하는 등 압박에 나섰고, 항소심 재판부는 세달뒤 국보법 위반에 형법상 간첩죄까지 추가해 죽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2월 대법원은 죽산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7월30일 변호인단의 재심청구가 기각되자마자 다음날 죽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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