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에서





금남로는 도청의 정문으로 해방이후 60년 광주를 지키던 관문이다.
금남로는 충장로와 더불어 지금은 도청이 목포로 이전하였으나   지정적으로 명실 공히 광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울분과 미래가 꿈꾸는 금남로...
군사정권이 광주를 점령해서도 가장 먼저 한 짓이 도청의 금남로를  점령한 것이었다.
계엄령이 내려질 때도 제일 먼저 금남로 앞에 탱크가 등장했다.
광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금남로 분수대에 모여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금남로 주변의 큰 건물을 보면, 광주의 경제 활동도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언론과 예술, 문화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고 역사가 함께하는 분수대로  발길을 옮겼다. 

나에게도 금남로는 마음의 흔적이 남아있다.

나는 금남로 뒷골목에서 오랜 기간 서성거렸다. 중-고등학교 때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공부를 멀리하고 여기저기 방황을 했다.
고3이 되어서야 대학을 가야겠다는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금남로 뒷골목에 있는 학원에 갔다.
 

 

그곳은 학원 밀집 지역이었다. 세칭 명문 학원이 즐비했고, 학원비도 고액이었다. 나의 학원 행은 우리 형편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삶에 흔들리고 있었다. 공부보다 책을 읽고 싶었다. 부모님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무거웠다. 참으로 힘든 생활이었다. 




그때 귀갓길에 나를 달래준 것이 음악이다. 
왕자관 건너편에 있는 2층에  가게가 있었다. 거기서 박인희의 ‘모닥불’이라는 노래가 자주 들렸다.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이라는 노랫말이 마치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도 자주 흘러나왔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며 들리는 박인희의 목소리는 애잔하고 슬프게 들렸다. 

그때 어린 나이에도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싶었다. 혼자서 가야 한다는 나그네의 길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길이 늘 괴로웠다. 잿빛 하늘같이 슬픈 내 삶을 낭송 배경 음악인 폴 모리아 악단의 ‘이사도라’가 위로해주었다. 







군에 갔다 와서도 나는 금남로에 있었다. 제대하고 나니 복학 날짜가 어정쩡했다. 6개월이 넘게 남아 있었다. **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얀 옷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메고 웨이터를 했다.  식사와 차 심부름을 했다.최고 책임자 식사까지 담당했다. 행사가 있는 날은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일을 마치고 충장로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때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모두 배우지 못한 청춘들이었다. 어떡하다보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삶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어쭙잖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친 삶에서도 굽히지 않는 삶의 뜨거움이 있었다. 그들은 역경의 삶에 흔들리면서도 꿈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고, 삶의 동력을 찾았다.





나는 충장로에서 미팅을 하고도, 일고 앞까지 걸어오곤 했다. 전투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날도 우리는 충장로 우다방 술집에 모였다.
먹은 술을 다시 토해 낼 때까지 끝도 없는 토론을 했다. 작가론 수업 종강도 이곳에서 했다. 솟구치는 시대정신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며 중앙교회 정규오목사님께 버릇없이 대들 때 목사님은 오히려 날 껴않어주셨다.




금남로에서의 추억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 삶에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때는 아직도 그리움이 가득하다. 일상적 삶이었지만, 모두가 일탈의 삶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라는 묘한 역사적 공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다. 
그 시절 우리는 어두운 하늘 아래 방황하는 젊음을 안고 있었다. 까닭 없이 서러웠고, 많은 차가움을 참고 겨울을 나야했다. 마음속에 답답함이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 광화문은 흰 눈조차 지저분하게 녹아내리던 기억이 펼쳐진다. 그러면서도 안으로는 뜨거운 생명을 닦으며 밤에도 잠들지 않는 꿈을 꾸었다. 

노동부청사가 무너져 도청앞에 있노라면 저만치 하얀거물이 보인다
KT건물이다. 날 힘들게 만들고 고통스럽고 인상을 찌프리게하는 건물이다
기억에서 지우고자한 편린들이 어거지고 스쳐지나간다.
무거운 머리를 북쪽으로 들어보니 예전의 상무관은 사라지고 무슨 계획이 있나보다


지금 금남로은 조용한 곳이다. 반면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는 새로운 광주의 중심답게 화려하다. 개인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거대한 집단에 매몰된 곳이다. 하지만 나는 금남로에 사적인 개인으로 돌아와 삶을 즐긴다. 현란하고 사치스러운 곳에서 빛바랜 추억을 물레질하고 있다. 

충장로 축제에 수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질의를하고 .... 그런 나의 제언이 수없이 구청과 시청직원들에게 묵살되고 방관되어도
금남로 방황은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삶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시간 여행이다.





잊을래도 잊을래도
불고간 바람처럼 잊어버릴래도
별처럼 새삼 빛나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잊을래도 그리워 잊을래도
차마 그리워
엄마처럼 다정한 피묻은 이름이여

잊을래도 잊을래도
실려 간 파도처럼 잊어버릴래도
물처럼 다가오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잊을래도 그리워 잊을래도
차마 그리워
바다처럼 다가오는 사뭇친 이름이여

 

 

 

 

 

첨부파일 잊을래도(김태홍,한만섭,엄정행).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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