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가 뭐꼬?

[강신준 칼럼] 가상화폐 소동을 읽는 경제학 원론

등록 :2017-12-24 18:07수정 :2017-12-24 18:56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어릴 적 야바위놀음을 떠올린 것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상화폐 소동 때문이다. 그것이 야바위놀음을 그대로 닮아 있다. 사실 이 소동은 오래전부터 숱하게 반복된 것인데 모두가 화폐를 둘러싼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념에 대한 경제학 자신의 혼란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어릴 적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유명한 벚꽃축제 장소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를 가려면 축제장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는 어린 눈을 사로잡는 볼거리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볼거리는 단연 야바위놀음이었다. 모두가 둘러서서 긴장의 촉각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은 한산한 시골의 일상을 흔들어 깨우는 흥분의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결과는 뻔했다. 이변의 환호는 거의 없이 언제나 구슬픈 탄식만 넘쳐났던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애초 그 놀음은 “없는 것을 있는 척”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어릴 적 야바위놀음을 떠올린 것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상화폐 소동 때문이다. 그것이 야바위놀음을 그대로 닮아 있다. 사실 이 소동은 오래전부터 숱하게 반복된 것인데 모두가 화폐를 둘러싼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념에 대한 경제학 자신의 혼란(케인스주의, 신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다르다)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혼란(화폐의 물신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중첩된 혼란에서 일반인들이 헤어나기는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소동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상식과 가까이 있는 법이다. 혼란을 수습할 단서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화폐를 들여다보면 금방 찾을 수 있다.화폐는 양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한쪽 면에는 숫자가 있다. 그것은 화폐로 바꿀 수 있는 가치의 양이다. 가치는 경제학에서 효용 혹은 노동으로 간주되고 전자는 교환의 기준, 후자는 생산의 기준을 이룬다. 교환은 서로 바꾸는 것일 뿐 무엇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가치를 만드는 것은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이다. 공기나 물을 가치로 매기지 않는 까닭도 그것이 효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동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화폐는 노동의 양을 표시한다.그런데 종이로 된 화폐는 노동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 화폐의 딜레마이다. 화폐는 “없는 것”을 “있는 것”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바보가 가치가 없는 것을 가치가 있는 것과 바꾸려 하겠는가? 이 해답이 화폐의 뒷면에 있다. 거기에는 화폐가 앞면의 가치와 교환되지 못할 경우 그 가치를 물어줄 사람이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화폐는 발행자의 채무증서이기도 하다. 화폐의 오랜 역사에서 발행자는 결국 국가로 귀착되었는데 이는 국가만이 부채에서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언제든 세금을 통해 자신의 부채를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가진 것이 그 이유이다.이 두 가지를 알면 가상화폐 소동이 터무니없는 혼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장 세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 가상화폐라는 용어이다. 화폐는 원래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가상”의 물체이다. 그런데 “가상의 가상”이라니? 둘째 가상화폐의 가격이란 용어이다. 가격은 화폐로 표시된 양이다. 가격이 곧 화폐이고 화폐 그 자체는 당연히 가격을 갖지 않는다. 가상화폐의 가격이란 곧 가격의 가격, 그것도 “가상의 가상”의 가격의 가격인 셈이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용어가 있을까? 셋째 발행자가 없다. 가상의 가치가 교환될 수 없을 때 가상을 현실로 복귀시킬 주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상화폐는 “없는 것을 있는 척”하는 것일 뿐이다. 야바위놀음을 똑같이 닮아 있다.그런데 우리나라가 이 소동의 세계 3위라고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실(노동)을 경멸하고 가상(불로소득)에 목을 매는 세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르크스가 물신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헬조선, 갑질, 부동산 광풍이 모두 그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인간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다. 결국 현실로 복귀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동의 끝을 주목해야 한다. 복귀할 현실은 외면했던 현실일 수 없다. 그래서 소동에는 새로운 시대의 징표가 숨겨져 있다. 150년 전 마르크스는 이미 이 소동에 “협잡꾼과 예언자의 얼굴이 뒤섞여 있다”고 알려주었다. 실제로 그 원조 격인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소동은 중상주의가 끝나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징후였다. 지금 우리의 새로운 시대는 무엇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상의 불로소득과 결별하고 현실의 노동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 존중, 가상화폐 소동이 알리는 이 시대적 과제를 우리 사회는 깨닫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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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4892.html#csidx29a821518b8b1b2a86ffe706b7a44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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