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하야 요구는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라는 함성이다.
작성자: 전태일 | 조회: 234회 | 작성: 2016년 11월 18일 9:03 오전사회주의 지향으로 헬조선을 변혁하는?
민중총궐기로 전진하자!!
우리는 왜 지금 사회주의 기치를 드는가?
민중의 하야 요구는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라는 함성이다.
나라 안팎으로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몰려오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의 쓰나미에 박근혜 정권이 쓸려나가면서 하야냐 2선 후퇴냐, 거국중립내각이냐 책임총리냐를 놓고 정국이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덮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퍼팩트 스톰인 이유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모두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닌, 수면 아래의 체제적 위기와 결부된 진정한 ‘정치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국내부터 보자. 지금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민중의 분노는 한 선무당이 대통령을 수렴청정하고 호가호위하면서 부정축재를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촉발되었지만 그것은 사태의 표면에 불과하다. 국정원 대선 개입, 대통령선거공약 파기, 세월호 학살과 진상규명 방해, 개성공단 폐쇄, 임의해고제와 성과연봉제 등 노동조건 개악과 노조탄압,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살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문제 밀실 합의, 사드 배치, 언론과 인터넷 통제, 간첩조작, 예술인의 블랙리스트 작성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박근혜 정권의 갖은 파쇼적 악정과 폭정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폭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집약하고 있는 ‘헬조선’은 박근혜 정부 들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단기간에 더 악화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헬조선의 실체는 박정희 개발독재로 구축된 후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도 온존된 채 이명박-박근혜와 같은 파쇼적 정권을 만들어낸 천민자본주의 체제다. 그런데 이 체제 안에 갇혀서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취업난 속에서 부채에 저당잡힌 채 연애·결혼·출산·취업·내 집 마련은 물론 희망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면서도 개인적인 탈출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청년세대들이 작금의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헬조선’ 체제 거부를 향해 저항에 나서고 있다. 정권 지지율 0%를 보라! 이들의 헬조선 전면거부를 배경으로 민중은 박근혜의 2선 후퇴와 거국중립내각에 대해 반대하며 박근혜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2선 후퇴는 현 사태를 박근혜-최순실 의 책임으로 봉합하려는 조·중·동의 플랜임을 모두가 잘 간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민중은 집권을 중심에 놓고 주판질하는 자유주의 보수 야당에 대해서도 매우 냉소적이다. 그들은 피동적으로 이쪽저쪽으로 동요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온갖 악정과 실정과 폭정은 박근혜·최순실만이 아니라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수구보수 세력 전체가 공범으로서 함께 저지른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남한 천민자본주의 지배체제가 빚어낸 문제다. 대중은 이미 그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2선 후퇴를 통한 모순의 봉합이 아니라 하야를 계기로 한 구조적 모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민중의 하야 요구는 헬조선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라는 함성이며 오늘로써 이 함성은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다!
이 천민자본주의 체제 문제는 축적 패러다임의 문제인 동시에 자본주의 그 자체의 문제다.
왜 민주정부 10년 동안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지 못하고 헬조선에 이르게 되었는가? 물론 궁극적으로는 진보·변혁세력이 제대로 투쟁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축적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경제의 명줄을 틀어쥐고 있는 재벌체제에 손을 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는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며 재벌에 투항하고 한미FTA를 체결하지 않았던가!
이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트럼프의 승리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된 직후 이미 힐러리를 앞섰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트럼프 현상을 만든 사회구조적 요인이 그의 그 많은 추문과 인격적 약점까지도 압도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은 한 세대 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던 신자유주의-세계화-미국 단일패권으로 연계된 기존 축적체제 또는 지배 패러다임의 붕괴의 산물이다. 이 지배 패러다임 아래서 희생되고 좌절해 온 노동자 대중이 한편으로는 급진 좌파적 대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적 대안으로 반란에 나선 것이다. 영국에서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 당수 당선과 브렉시트,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의 돌풍과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같은 정치적 양극화 현상은 다른 여러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이미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지금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특정한 축적체제 또는 지배 패러다임 수준의 위기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세계화-미국 단일 패권 체제에 의해 간신히 지탱해 오던 세계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 자체의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위기인 것이다.
문제는 노동운동의 타협과 투항이었다.
근대 이전의 신분공동체를 해체하면서 등장한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윤동기와 냉혹하게 관철되는 가치법칙에 의거하여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생산력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전투적·혁명적 투쟁의 성과로 부와 권력의 재분배와 보편적 복지라는 역사적 진보를 일정하게 성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축적과 노동복지의 향상이 공존하고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을 이루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서유럽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조차 한 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복지국가의 위기와 해체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법칙적으로 작동하면서 이윤과 축적이라는 자본의 지상명령 앞에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진보적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국 대처의 말대로 이제 더 이상 중간은 없었다. 이윤을 위해 인간(노동계급)이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는 자본관계에 더 강하게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성과를 딛고 새로운 역사적 생산관계로 나아갈 것인가? 이 역사적 기로에서 이미 타협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던 선진자본주의 노동자계급의 주류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열정과 의지를 접었고, 그 결과 노동자계급은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 이후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노동자계급의 저항력 약화, 그리고 미국 패권 하의 신제국주의 체제에 힘입어 자본주의는 이럭저럭 40년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과잉생산-과잉축적이라는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은 1990년대 말 이래 약한 고리에 있는 몇몇 국가와 지역들에서 위기를 일으키더니 결국 2008년 세계적 범위의 대공황으로 터져나왔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언제 ‘퍼펙트 스톰’이 찾아올지 전전긍긍하는 대공황이 8년째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대안 없음’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있지만 케인즈주의-사회민주주의적인 개혁의 공간도 남아 있지 않다. 유례없는 구조적 대량실업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사회해체의 위기, 그리고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이윤과 축적이라는 자본의 지상명령 앞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그 지상명령을 거부하지 않고는 앞으로도 결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비전
우리나라 운동 안에서 한때 “우리 운동에 비전과 전략이 없다”는 말이 많았다. 비전과 전략이라는 표현은 종래 변혁운동에서 ‘이념’과 ‘노선’이라고 말하던 것 –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과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변혁 노선 같은 것 말이다. – 을 조금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뜻도 함축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건축물을 짓듯이 어떤 청사진을 그려놓고 현실을 거기에 꿰맞추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마르크스의 이런 말 때문인지 사회주의 운동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루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윤곽조차 없다면 우리 사회주의운동의 지향목표는 국유화와 계획경제 같은 극히 추상적이고 빈약한 내용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과 전략은 현실과 경험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 기초하여 그려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요하게 짚어야 할 지점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성찰이다. 둘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차이를 넘어서 21세기 인류문명이 도달한 지점에 대한 성찰이다. 이런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비전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하는 데 국한하고자 한다.
하나. 20세기 사회주의는 위대한 성공을 이룩한 동시에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다. 성공한 것은 자생성에 순응하지 않고 목적의식적으로 변혁을 추진 한 데 힘입었다고 평가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은 사회체제를 변혁한 이후 또는 변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함께 인간의 활동과 인간의 의식이 긴밀하게 맞물려서 변혁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응분의 통찰이 부족했다. 필요한 의식은 단순히 사회주의 도덕 수준의 의식이 아니었음에도 실패한 사회주의에서는 그런 정도의 문제로 간주됐다.새 사회주의 사회는 체제의 구조가 새롭게 변혁될 뿐 아니라 그 사회구성원의, 특히 노동계급의 의식과 활동이 획기적으로 변혁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 판매자로, 임금노동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노동자는 그런 상품판매자 의식을 변혁하여 노동을 자기 자신의 표현인 동시에 사회적 임무로서 기꺼이 받아 안는 새로운 인간으로, “각자가 유일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중적 실존”, 사회적 개인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말하고 듣는 ‘평등’은 상품관계를 부정하는 인간의 존엄성에서의 평등 – 그것은 인간의 능력과 인간적 필요에서의 불평등의 인정이다! – 이 아니다. 자본주의 하의 평등은 노자간의 이익균점(연말 성과급!)과 노동자 상호간의 동일노동 동일임금(비정규직 철폐!) 같이 여전히 자본주의 상품관계 안에서 상품 소유자와 판매자로서의 평등을 추구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이런 소부르주아적인 의식으로서는 결코 노동이 해방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없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는 노동의 무상 제공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인간의식의 변혁을 위해서는 인간활동의 변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즉 사회주의 안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교환하며, 그 과정에서 생산성이 높은 노동이 생산성이 낮은 노동에 비해 임금과 이윤으로 더 많은 보상을 획득하는 생산관계가 철저히 타파돼야 한다. 사회주의는 원칙적으로 자본관계 즉 착취관계와 공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치관계 즉 상품관계와도 공존할 수 없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만큼 분배 받는다는 종래의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요소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자본주의의 잔재로서 일부분 남아 있을 뿐이다.
둘. 경제활동의 목적은 자본주의에서처럼 더 이상 더 많은 교환가치의 획득이 아니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사용가치의 생산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향유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맹목적인 생산을 위한 생산은 더 이상 추구되지 않는다. 생산력 발전이 낙후되어 있던 20세기에는 사회주의 건설이 곧 생산력을 발전시켜 자본주의를 따라잡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생산력주의가 사회주의를 왜곡시키고 실패로 이끌었다. 지금도 물질적 부와 생산력 발전을 최우선시하면서 상품과 이윤을 일반화하는 사이비 공산주의가 있다. 그런 사회주의는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며 그런 사회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새로운 사회주의는 생산력 발전이 다소 더디더라도 생산력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의 근본 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새 사회주의에서는 인간적 부(富)를 증대시키는 것이 사회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경제적 부는 그 수단의 지위에 머물러야 한다. 인간적 부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고 인간성을 전인적으로 계발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가난한 옛 농경사회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인간성의 고도의 발전이요 근본적인 인간해방이다. 이것은 노동해방 다음 차례가 아니라 그것과 동시 병행적으로 추진된다.
그렇다고 물질적 부에 대해 소홀히 대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의 양적 증대가 아니라 질의 향상을 추구한다. 동시에 동일한 양의 사용가치를 보다 적은 노동으로 그리고 보다 적은 자원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절약을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양적이 아닌 질적인 성장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셋. 20세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가 결핍되고 관료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인식이 많다. 그런 측면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노동대중이 여전히 노동력 상품 판매자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 더 중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결핍도 또한 제국주의의 포위보다는 20세기 사회주의 실패의 더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관료주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러면 그 대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혼선이 많다.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동구식 국유화·계획경제 체제와 접합시키면 되겠는가? 그렇게 하자는 것이 유로코뮤니즘인데, 그것들도 동구의 붕괴와 함께 붕괴하고 자본주의에 투항했다.
사회주의 사회에 필요한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이지 자본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구체적 형태는 다양할 수 있으나, 그 원리는 분명하다. 실권은 의회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기구에 있고, 의회에 대해서는 국민은 의원을 뽑을 권리밖에 없고 의원이 대중을 대리하는 부르주아 의회주의는 절대 아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처럼 경제를 정치에서 분리시켜 시장에 맡기지 않는다. 또 국유기업에게 맡기지도 않는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분배할지를 사회적·정치적으로 결정한다. 또 경제적·정치적 의제 전반에 걸쳐 입법은 의회에서 하고 집행은 정부에서 하는 식으로 분리함으로서 실권을 관료체계에 맡기지 않는다. 즉 입법과 집행을 통일시켜 민중 자신이 입법하고 민중 자신이 집행한다. 또 권한과 책임을 아래에서 위로 위임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의회 같은 대리기구에 권한을 전적으로 양도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대리인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권력이 항상 국민에게 귀속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민중이 형식적으로만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자기통치의 민중권력을 실현한다.
넷. 인류문명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문자 그대로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을 만든 것이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자본은 세계시장은 만들었지만 인류를 하나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류를 여러 공동체로 파편화시키고 나아가 각 공동체를 내부적으로 해체시켜 파편화시켰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인류형성에 오히려 역행했다. 이제 인류의 과제는 상품적·자본적 관계로 맺어진 인류를 인간적 관계로 맺어진 진정한 인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 사회주의는 국제적인 것을 넘어 인류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조국은 인류다” 이런 차원에서 인종적 차별은 물론이고 성적 차별과 문화적 차별을 비롯한 인간에 대한 일체의 인간차별이 사라진 사회주의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 사회주의는 계급적 해방에 머무르지 않고 그와 동시에 보편적 인간해방을 지향하며, 또 민족해방에 머무르지 않고 그와 동시에 인류공동체 형성을 지향한다.
다섯. 현재의 인류문명은 지금 한편으로는 자연을 파괴시킴으로써 자신의 생태적 지속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제국주의 패권쟁탈전으로 인류를 절멸시킬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공공연한 선제 핵공격론을 보라!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연에게 지배받던 단계에 있지 않다. 자연의 지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왔으나 마침내 그것이 한도를 넘어 자연을 파괴하는 지점에 이르고 있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를 보라! 21세기 사회주의는 인류적이고 인류사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에 응전해야 한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폐기돼야 하고, 지구 생태계는 소중하게 관리·보존 되어야 한다. 인류는 지금 현재 이 지구촌에 살아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앞으로 두고두고 살아갈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핵무기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비핵화 돼야 하며, 핵전쟁은 영원히 포기돼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착취와 전쟁에 이용도지 않고 인류의 물질적 삶의 질을 높이는 목적에만 이용돼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과 기술의 개발은 민중에 의해 통제된다.
여섯. 새 사회주의 사회는 평생 학습하는 사회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의식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어느 의식이나 그렇지만 자생적인 상태에 맡겨두면 사회주의 의식도 희미해진다. 뿐만 아니라 어느 생산양식이나 그렇지만 사회주의 사회도 지속적으로 고도화 되어야만 지속된다. 즉 사회주의적 관계가 고도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활동의 고도화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의식의 고도화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적 의식의 발전은 교육과 실천 두 통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육 없는 실천과 실천 없는 교육 어느 것으로도 사람의 의식은 잘 발전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 교육은 교육받는 사람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는 사람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자기교육이어야 한다. 교육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러한 윤곽을 가지는 사회를 우리는 20세기의 실패한 사회주의와 구별하여 21세기 사회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21세기 사회주의가 가져야 할 비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지점이 더 많이 연구·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실천전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분명히 한다면, 아무리 좋은 비전도 그것을 자기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 안는 사회집단이 없다면 관념상의 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계급으로 분열된 어느 인종이나 민족이 받아 안을 수 없다. 이 비전 자체가 계급분열의 폐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전은 오직 낡은 계급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는 노동계급만이 받아 안을 수 있다.
노동자 동지들! 자신감을 가지자.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다.
2016년 11월 12일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인간해방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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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하야 요구는 천민자본부의 체제를 변혁하라는 함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