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에 바란다!

혁명적 위기1) 하 민주노총 정책대대에 바란다.


 

김승호(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악몽(꿈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대들은 자기 자신과 사물들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바로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노심초사하여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내어 자신에게 봉사케 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그리고는 그 유서 깊은 분장과 대사로 세계사의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상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소책자인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2)앞부분에 있는 글이다.

  

이 글은 현재의 우리 노동운동에게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하나. 신(神) 대신 인간이 역사의 주인으로 자리매김 된 근대 이후, 인간이 어떻게 역사를 만드는가를 둘러싸고 경제결정론과 같은 구조결정론과 주관주의·주의주의 역사관이 병존해 왔다. 하지만 피동적인 구조의 효과와 능동적인 주체의 실천이라는 그 두 측면은 일면적으로 강조될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만들어 감에 있어 인간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구조의 작용을 주어진 조건으로 하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인간 주체들의 능동적·목적의식적이고 창조적인 실천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 단계 혹은 한 걸음씩 전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농노제에서 임금노동제로, 임금노동제에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즉 사회주의로! 이치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낡은 사회질서는 오직 자생적으로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사회의 합법칙적 진보와 변혁이 주체들의 목적의식적 실천에 의해 앞당겨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피동적으로 주어지는 구조의 효과만을 일면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노동운동 안에는 이런 자생성에의 굴종이 지배적 조류를 이루고 있다. 모두들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를 사용하면서 변혁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것이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둘.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할 때, 즉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역사를 만들어 갈 때, 사물들 즉 인간이 관계하는 인간 바깥의 대상세계인 자연과 사회를 바꿀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바꾼다. “살아 있는 세대들은 자기 자신과 사물들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한다. 우리 노동운동 안에서는 이 지점에 대한 통찰, 역사 진보나 사회 변혁에 있어 인간 활동과 인간성의 변혁이 필수적인 한 항목이라는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나 사회주의로의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본주의적 인간으로부터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부분적으로든 전면적으로든, 자기 자신을 변혁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말이다. 노동운동은 노동대중을 자본이 원하는 자본을 닮은 인간형으로, 사적인 물질적 욕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속물적·이기적 인간형으로 형성되도록 방치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면서 말이다. 탈(脫)물질주의적이고 이타주의적인 인간으로의 변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민주노총이 며칠 후 정책 대의원대회를 연다. 이런 종류의 대의원대회를 여는 것은 처음 있는 신선한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의 시기에 노동운동체가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자기 스스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점에서 썩 시의적절한 시도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 민주노총이나 노동운동에 필요한 것, 요구되는 것은 자본과 정권에 대응하는 정책이든 노동 내부를 추스리는 정책이든 단순한 정책 수준의 변화가 아닐 것이다. 역사의 현 단계는 그 이상의 변화, 이념과 전략을 포함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자기 자신의 변화,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정책대대는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와 역사의 요구와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16세기 초엽 무렵에 태동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19세기의 상승기를 지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쇠퇴기인 제국주의 국면에 이르렀다. 이 쇠퇴기 중에 1930년대 경제대공황을 맞이하고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치렀다. 그 후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는 자신의 작동원리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여 수정자본주의가 돼야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30년 간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 수정자본주의 역시 한 세대 만인 1970년대 중엽에 위기를 맞이했고, 이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자본주의는 1980년대 초부터 수정자본주의를 폐기하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반동적인 국면으로 치달았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정당성을 소진시키는 자본주의 종말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또한 한 세대 만인 2000년대 중반에 20세기 경제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대공황을 맞이했다. 종말기 안에서 일대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21세기 경제대공황/대불황이 10여 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공황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수술하지 않고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부채에 의거하여 투자와 소비를 부추겨서 억지로 성장을 만들어 가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고3). 마이너스 금리와 제로 성장이 정상으로 되어가고 있다.4) 그 원인을 극히 압축하여 말하자면 이윤율 저하 및 그 상쇄에 따른 분배 양극화라는 경제적 법칙과 그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노동계급의 노동력 재생산 거부라는 종말기 자본주의 인구법칙5)이 중첩된 때문이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이러한 고유한 모순과 위기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선진 자본주의에 근접하는 경제의 성장·발전 및 물질적 소비의 향상을 달성한 예외적인 국가다. 이런 소비문화의 발달은 한류 수출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등의 경제성장과 발전도 주목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들은 중화학공업 및 IT가 발달하여 세계 10위권에 근접하는 경제규모를 달성한 한국과 비교되지 않는다. 소비문화의 격차는 더욱 비교되지 않는다. 상층 엘리트들은 그런데도 ‘헬조선’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6)

하지만 보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도가 높거나 낮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 자살률도 세계 최고다. 이런 현상은 일시적이 아니라 추세적이다. 그밖에도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안 좋은 것들이 많은데, 최근에 보도된 바로는 결핵 감염율과 사망률 또한 세계 최고라고 한다.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도 세계 최고다. 왜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현 단계 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신자유주의) 일반인 동시에 특수하게 노동의 무권리와 자본의 무한한 권리를 결합한 천민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올림픽 메달을 딴 유도 선수의 꿈이 불로소득인 임대료를 뜯어먹고 사는 빌딩 소유자가 되는 것이겠는가. 이런 천민자본주의는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지배와 착취?수탈 질서 하에서 제도화되고 고착되었다. 즉 천민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주의적 모순과 식민지적 모순이 구조적으로 중첩된 결과 한국 자본주의에는 발달이 고도화할수록 그 모순이 더욱 극도로 심화되는 법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면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세상이 바뀌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세상을 바꾸고 이 모순을 해결할 것인가. 작년 10월 17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청소년 2차 거리행동’에 참가한 경기도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서울 종로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시위를 마친 뒤 어느 인터넷 미디어와 촬영한 동영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 밀어붙이고 있는 키워드는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입니다. 지금 이 동영상을 보고 계실 분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입니다. 하지만 사회구조와 모순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뿐입니다.”7)

지배계급은 이 말 가운데 레볼루션이라는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이 학생의 말 가운데 더욱 주목해야 할 지점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말이다. 그 학생은 자신이 어느 계급 구성원인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또 부르주아 계급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자본주의 세상을 인간다운 삶이 실현되는 “사람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오직 노동계급만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공자님 말씀에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나이든 노동자들이 주역인 우리 민주노동운동은 예비노동자인 이 고등학생으로부터 머리를 숙이고 크게 배워야 할 판이다. 1970년 당시 22세의 청년 전태일에게서 나이든 사람들이 배워야 했듯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민주노총은 조합원의 대표체를 탈피하고 노동계급의 대표체로 거듭나야 하고, 진보개혁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기치를 치켜들어야 한다. 전노협의 망령을 불러내고 전노협에게서 “(2)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전투구호를 빌려와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산별노조를 강조하면서 무력화시켰던 지역 연대체에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겠다.”는 결의로8) 연합단체(상급단체) 지위를 부여하는 조직혁신을 실시해야 한다. 이것은 지도부 직선제 실시 다음 단계의 의미 있는 혁신이 될 것이다.

지도부 직선제가 의제에 올랐을 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거나 직선제를 실시할 때 생겨날 부작용을 우려하면서 소극적으로 대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되고 어렵지만 인 지도부 직선제에 도전했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악 저지 총궐기 투쟁을 힘 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법 개악 기도는 일단 저지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조성된 정세는 방심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더욱 깊어지고 있고 자본의 공세는 계속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엄중한 정세인식과 지도부 직선제가 성공한 지난 도전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또 한 번 과감하게 혁신에 도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8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조합주의적 정체성이 아니라 2천만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계급적 정체성으로, 진보와 개혁을 넘어서 해방과 변혁으로 도전하는 진취적인 노동운동체로 자기 자신을 혁신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민주노총의 이번 정책대대는 신선하고 시의적절한 시도를 넘어 감동적이고 역사에 남는 대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2016년 8월 17일)


 


 


1) ‘혁명적 정세’란, 레닌에 따르면, ①지금까지 형태로는 그 지배가 불가능하게 되는 상층의 여러 위기가 발생하여 피억압계급의 불만이 폭발할 것 ②피억압계급의 결핍과 곤궁이 현저하게 악화될 것 ③이 같은 원인에 의해 대중행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 등을 들었다. ①과 ②의 조건은 충족되었다. 이대 학생들의 총장퇴진 요구 농성과 성주 군민 1천여 명의 사드 한국배치 반대 삭발 투쟁에서 보듯이 ③의 조건도 실현되어 가고 있다.

2) “자신의 노작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1851년 12월 2일에 일어난 보나빠르뜨의 쿠데타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쿠데타가 선행된 사태 진행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보나빠르뜨의 반혁명적 입장의 합법칙적 귀결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예에서 역사의 원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역할을 설명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저작에 들어 있는 이론적 일반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및 혁명론의 심화,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의와 관련된 심화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부르주아 혁명은 낡은 국가를 넘겨받았을 뿐이며 피착취 계급에 대한 억압을 한층 더 완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낡은 국가기구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분쇄해야 한다는 명제를 처음으로 정립하였다. 마르크스의 이 노작은 1852년 5월 말에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바이데마이어에 의해 발간된 잡지 『혁명, 부정기 간행물』의 제 1호에 처음으로 실렸다. 본 판은 마르크스가 손질한 1869년 판에 기초하고 있다. 군데군데 문체상의 수정은 1885년의 제3판에서 취해진 것이다.” 이상 박종철 출판사 편『선집』제2권의 후주 135를 옮김.

3) ‘통화정책 전문가 버나드 리테어의 경고: “나이 들면 돈 빌리겠나... 빚 권하는 통화정책 종말 온다”, <중앙일보> 7월 29일자 참조.

4) 성장이 멈추는 대불황에 따라 노동자의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부유한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2000년 이후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연령층에서 자살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00,000명당 15명에 이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2015년 4월30일-5월6일자 34쪽, ‘자살, 그 비극적 트렌드’(Suicide, The saddest trend)를 참조.

5) 자본주의 인구법칙은 상승기에는 높은 출산율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과도한 인구증가가 자본축적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하는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출산율은 점차 저하되었고, 종말기인 신자유주의 국면에 들어와서는 출산율이 더욱 낮아져서, 노령화로 총인구수는 유지되지만. 아동과 청년인구의 단순재생산마저 불가능하게 되고 있다. 이것은 스웨덴이나 프랑스 같이 비교적으로 사회민주주의 경제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에 공통된 경향이다. 이 경향은 21세기 경제대공황이 지속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이코노미스트>지 같은 호 53쪽,  ‘인구학: 아기가 없어진 이상한 사건’(Demography: The strange case of the missing baby)를 참조. 이 글은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예상했던 대로 부유한 나라들에서 출산율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출산율 급락(baby bust)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정말로 수수께끼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구의 단순재생산에 필요한 출산율이 2.1임에 비해 출산율이 가장 높다는 프랑스가 2.0 수준이고, 독일은 1.5수준이다. 이것도 이주노동자들의 높은 출산율이 포함된 평균 수치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2016년 상반기 1.2 이하로 추산되었다.

6) <조선일보> 2016년 7월14일자 양상훈 칼럼 참조. 이 칼럼은 한국을 방문한 어느 미국 교포의 다음과 같은 페북 글을 길게 인용했다. “한국에 와 보니 웬만한 동네는 고층 아파트화돼 있다. 미국에선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공중화장실에도 있고, 주차장은 자동인식으로 들어가고, 집 문은 비밀번호나 카드로 열고, 대중교통은 카드 하나로 해결된다. 집에서 버거를 시켜 먹고 차마다 블랙박스, 집 전등은 LED다. 미국에서 나름 부자 동네에 사는 나도 놀라고 부러워한다. ... 집마다 TV채널은 끝이 없고 WIFI가 잡히는 버스 정류장은 차가 언제 오는지도 알려준다. 싼 택시, 조금만 걸으면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 등을 이제 며칠 후면 잃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만나는 한국 사람마다 자신들이 지옥에 살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무능 정치, 비싼 전셋값, 힘든 교육.... 오늘도 월세로 매달 수천 불을 버리며 사는 미국 사람들보다 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연봉이 나보다 2분의 1 적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차, 더 비싼 음식, 더 고급 제품이 있는 삶을 살면서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료보험료가 10분의 1밖에 안 되고, 치료비도 10분의 1로 느껴지는 이곳이, 같은 10불짜리 밥을 먹어도 팁이 없어 25% 할인받는 것 같은 이곳이 지옥이라니 신기하다. 50대(代)만 되면 회사에서 쫓겨난다는데 내 주변에 해고당한 사람은 미국에 더 많은데... 나도 여기에 오래 살면 이들처럼 느끼게 되겠지. ... 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 채로 오늘도 많은 이들의 불평을 듣고 있다. 잘 살면서도 가난과 위기를 노래하는 내 조국....” 스스로 미국에서 부자 동네에 산다고 자랑하는 그의 눈에는 고층 아파트 동네에 사는 상층부 사람들의 삶만 보이고 그 변두리에 사는 기층 서민들의 삶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부자들의 눈과 꼭 마찬가지다. 민중의 삶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그의 말은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된다”고 한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뚜와네뜨의 말처럼 들린다.

7) 이 인터뷰 동영상은 2015년 11월 6일 유튜브(youtube)에 올랐다. ‘전혜린,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으로 검색할 수 있다.

8) 현행 노동법은 지역별 연합단체는 연합단체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고 규정하여 지역연대체가 자체의 의무금을 걷고, 자체의 예산으로 상근자를 두고 활동비를 사용하며, 연합단체로서 지역 총파업을 결의하는 등의 활동을 법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정 당시 이 악법에 타협했고, 한국노총처럼 지역연합체를 지역본부로 재편했다. 그 결과는 지역연대의 약화와 중소 사업장 노조 조직의 감소 및 노조 조직율의 지속적 저하였다. 정책대대 의제에 조직 확대와 강화가 들어 있지만 기존의 틀 안에서 좀 더 잘하자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타의 의제들도 비슷한 수준의 내용이다.




현장의 목소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