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반전의 표본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친구가 불러주는 바람에 미국 대학에 적을 뒀다. 그나마 연구실을 배정받아 책 볼 공간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석채 KT 회장이 어려웠던 시절 미국 미시간대에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얘기다. 이 회장은 PCS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검찰수사를 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 일은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심적 고통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대단한 인생 반전이다. 지난해 1월 회장을 맡은 이후 ‘놀랄 정도로’ 모든 일이 순항하고 있다. 이 회장은 ‘공룡 KT’를 움직이게 하는 ‘명조련사’가 된 듯하다. 쉽지 않다던 KTKTF 합병을 단시일에 해치웠다.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아우성인 상황에서 KT가 무려 6000명을 잘라내도 다들 잘했다고 칭찬 일색이다. 노조도 동의했다.

지난해 쇼킹했던 일 중 하나는 KT가 아이폰을 내놓은 일이다. 번번이 SK텔레콤에 뒤지던 KT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스마트폰 시장에서 선점했다.

아무래도 10년 가까이 와신상담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관료의 때를 벗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선제적 대응과 자율경영으로 ‘주인 없는 민영화기업’의 폐단을 역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특유의 자신감과 리버럴리스트 기질도 한몫했다.

이 회장은 취임 첫해에 ‘바람’을 잡는 데 성공했다. 프로선수는 2년 차 징크스가 있다. 이제는 실적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아이폰 돌풍은 SK텔레콤 등 경쟁자들이 현실에 안주한 탓이 크다.

마침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들고 나와 또 한 번 세상을 흔들어놨다.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시간차 공격’으로 모바일 비즈니스의 새 시장을 만들고 있다.

애플 사례에서 보듯 스티브 잡스라는 뛰어난 CEO가 회사를, 그리고 세상을 바꾼다. KT가 애플처럼 바뀌지 말란 법도 없다. 모바일 세상에서의 경쟁은 플랫폼 전쟁이라고들 한다. 삼성전자LG전자와 같은 하드웨어 업체보다는 통신서비스 회사인 KT에 기회가 더 많다. 아이폰 경험을 바탕으로 KT 스스로 앱스토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만일 내부 인력으로 불가능하다면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면 된다. 이 회장은 정통부 장관으로 갈 때 경제부처 국장·과장급을 여러 명을 함께 데려가 조직문화를 바꿨던 경험이 있다.

내부개혁만으로 어렵다면 KT의 우산 아래 수많은 IT 벤처기업을 두는 방법이 있다. 모바일 소프트웨어라든가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에게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직접 지분을 인수하거나, 계열사나 펀드로 간접적인 자금지원에 나설 수도 있다. 마침 청년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점에 희망의 싹을 틔우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협력 회사를 계열사처럼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KT의 여전한 ‘공기업 마인드’다. 민영화 이후 정부 주식은 한 주도 없다. 그렇지만 유선 등 몇몇 분야에서 독점 기업이다 보니 협력업체를 머슴처럼 대하기 일쑤다. 이런 이유로 옛 한국통신은 포털·이메일·전자상거래 등에 좋은 사업기회가 있었지만 다 놓쳤다. 먼저 시작했지만 밀려난 것도 있고, 하다가 흘려보낸 것도 부지기수다. 네티즌이나 개발자, 유저 프렌들리 회사로 거듭나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플랫폼 싸움은 결국 소비자, IT 개발자들이 판가름한다. 순수 민간 대기업도 따라가기 힘든 일인데, 보수적인 KT가 해내려면 보통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투명한 인사를 정착시키는 일도 큰 과제다. 최근 KT에선 상무보 200여명 중 80여명이 명퇴했다. 여기저기서 청탁이 없었을 리가 없다. 아직 잘못된 관행이 남아 있다.

또 이석채 회장이 반드시 임기를 지켰으면 한다. 임기 후반기가 되면 중요한 경제부처 수장 후보로 떠오를 텐데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청와대나 정치권에서도 불러내면 곤란하다. 결국은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피델리티 한국 대표는 이석채 회장을 만나본 후 투자를 결정했다고 했다. 피델리티가 KT 주식을 산 것은 10여년 만에 거의 처음이라고 한다. ‘쿡앤쇼’ 광고처럼 톡톡 튀는 아이디어 경영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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