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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BR>개티 발바리와 노쇄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BR><BR><BR>? =======================================================<BR><BR> <P></P> [사건과 사람] 총탄 3발 맞았는데 진급 차별… 표창도 버렸다 <P class="date"> </P>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추격작전서 부상 이종갑 예비역 소령 <BR><BR>"참모총장 표창이요? 쳐다보기도 싫어 내버렸어요." <BR><BR>23일 서울 공항동 자택에서 만난 예비역 소령 이종갑(55) 씨는 1996년 그 날의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를 쳤다. 무장 침투한 북한군의 총탄을 3발이나 맞았으니 몸서리칠 법도 하건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차라리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사지(死地)에 투입됐던 부하들을 외면하는 군 지휘부의 냉대와 차별은 견딜 수 없었죠." <BR><BR>꼭 잡고 싶었다, 내 몸을 던져서라도 <BR><BR> <P class="ph"><IMG alt="" src="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1108/27/hankooki/20110827023315872.jpg" width="350"></P> <P class="txt">↑ 이종갑 전 육군 소령이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북한군의 총탄이 관통해 움푹 들어간 왼팔을 보여주고 있다. 이씨는 &quot;영광의 상처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아픈 기억일 뿐&quot;이라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P> <P> </P> <P> </P> <P> </P> <P> </P> <P> </P>이 씨는 군 생활 18년 중 10년을 북파공작원(HID) 교관으로 근무했다. 대북침투조를 양성하는 극비 임무다. 이 씨 자신도 강하훈련, 수중폭파훈련 등 온갖 특수훈련을 마친 정예 요원이었다. <BR><BR>96년 9월18일, 북한군 25명을 태운 잠수함이 강릉 대포동 앞바다에서 좌초된 채 발견됐다. 침투 당일 이광수는 민가에 숨어있다 잡혔고 이후 11명은 자살, 11명은 교전 끝에 사살됐다. <BR><BR>이들은 모두 잠수함 승조원에 불과했다. 핵심은 살아 남은 나머지 2명이었다. 김정일이 "1개 사단 병력(8,000~1만 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한 최정예 침투조였다. <BR><BR>이 씨는 당시 육군 3군단 정보분석장교로서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짰다. 하지만 남은 2명은 보란 듯이 칠성산, 홍천, 오대산 등 강원도 일대를 누볐다. 공수부대와 특전사, 특공여단이 저격조로 투입됐고 군인과 예비군 수천 명이 가세했지만 좀체 소득이 없었다. <BR><BR>이 씨는 "침투조가 향로봉을 거쳐 북한으로 되돌아가면 끝장이었다. 또한 단풍철이라 설악으로 넘어가면 민간인 피해가 우려됐다. 그래서 촘촘하게 포위망을 짜고 운신의 폭을 좁히는데 주력했다. 자연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BR><BR>북한군 2명은 포위망을 농락하며 병사와 민간인들을 조준 사격했다. 시신을 흔적 없이 묻어 출동한 경찰이 허탕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아군끼리 오인 사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사와 민간인 15명이 죽고 10여명이 다쳤다. <BR><BR>그는 "저들의 눈에는 사방이 손쉬운 표적이었다. 우리는 울창한 숲 속에서 단 2명을 잡아야 했다. 인명피해가 늘고 세간의 지탄이 쏟아지면서 피가 말랐다. 빨리 끝내야 했다"고 말했다. <BR><BR>세 발의 총성, 추격의 끝 <BR><BR>침투 49일째인 11월5일 새벽, 강원 인제군 용대리에서 초병들이 북한군과 교전했다. 이 씨는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되뇌이며 현장에 출동했다. 탄피를 분석하며 도주방향을 예측하던 순간, 해가 막 떠올라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사이 숲 속에서 "탕, 탕, 탕"하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첫 발은 이 씨의 왼팔 윗부분을 관통해 뼈와 살이 뜯겨졌고, 나머지 두 발은 팔꿈치 아랫부분을 스쳤다. 계속되는 총격에 근처에 있던 장교 3명과 병사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BR><BR>북한군 2명은 뒤쪽에서 덮친 특전사 요원들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기나긴 추격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은 1명이 더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 씨는 "다음 날 바로 작전이 종료됐다. 북한군이 더 있었다면 그랬겠나"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군 당국도 "놓친 북한군은 없다"는 입장이다. <BR><BR>이 씨는 "너덜해진 왼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했지만 병원 수술실에 들어가서야 통증이 밀려왔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고 말했다. <BR><BR>부상은 심했다. 오른다리 정강이 뼈를 잘라 왼팔에 붙이고 혈관도 이식했지만 뼈와 근육을 간신히 연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살은 여전히 움푹 파여있고 왼팔과 왼손가락은 힘을 쓰지 못한다. <BR><BR> <P> </P> <P> </P> <P> </P> <P> </P> <P> </P>훈장 못 받고 진급도 탈락, 군이 나를 버렸다 <BR><BR><BR><BR><BR><BR><BR><BR><BR>그래도 망가진 몸은 상관없었다. 진짜 시련은 그 다음이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자 육군 3군단은 "치료기간이 길어져 소속부대가 바뀌었다"며 관사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졸지에 가족들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900여 만원의 병원비도 절반 정도는 본인이 먼저 내고 몇 년이 지나 할부로 나눠 받는 방식이었다. <BR><BR>작전이 끝나자 40여명이 훈장, 20여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부상자들은 모두 참모총장 표창에 그쳤다. 그는 "작전에 참여하지도 않은 군 고위층이 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거들떠도 안보더라. 이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BR><BR>이듬해인 97년, 중령 진급심사가 있었다. 그는 전상(戰傷)을 입었고 과거 최우수 교관으로 선정되는 등 촉망 받는 군인이었기에 진급 1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탈락했다. 이 씨는 "주변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심지어 지뢰지역에 잘못 들어가 다리를 다쳐도 진급했다. 난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 뛰어들었지만 비주류인 3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차별을 견디며 더 이상 군에 남을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BR><BR>전역 후 잇따라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지금은 연금과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두 자녀를 賓帽竄置求?형편이다. 반면 당시 침투했던 북한군 이광수는 해군 군무원에 채용돼 정신교육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조적인 처지에 억울할 만도 하다. <BR><BR>그러나 이 씨는 "그런 생각은 단 한번도 안 했다. 그도 나도 각자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BR><BR>이 씨는 다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손자병법에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이라고 했다. 결국 군인은 한 번 싸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몸을 바쳤기에 침투한 무장공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망신창이가 된 부하를 내팽개치면 어떡하나. 더 이상 나 같은 군인은 없어야 한다<BR><BR>================================================================<BR><BR>더 이상 나 같은 KT 직원도 없어야 합니다<BR><BR>경쟁현장에서 맘대로 부려먹고.. 강퇴시키는 자들.<BR><BR>상품판매? 그것은 가식이요 핑계입니다<BR><BR>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는냐 안맞느냐가 관건입니다<BR><BR>그들에겐 경쟁승리 보다도 실적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BR><BR>비로 "자기들의 비리를 누가 알고 있는가!" 이것 이었습니다<BR><BR><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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