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상반된 판례로 하급심 판결 혼란
1·2심은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로 자살한 것이라 볼 수 없다”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달 대법원은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주위 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추단할 여지가 있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최근 대법원이 하급심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은 자살 사건을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취지로 파기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올해 초에는 1·2심이 인수합병 뒤 권고사직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끊은 김아무개씨 사건에서 ‘사회 평균인’ 기준을 적용해 원고 패소시킨 것을 대법원이 개인 특성을 더 따져보라며 파기했다.
대법원의 파기 취지를 종합하면, 하급심이 ‘사회 평균인’을 기준으로 당사자들의 스트레스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또 구체적 심리를 다 하지 않거나 업무 관련성이 있는 증거를 배척하지 말고 자살 경위를 충실히 따져보라고 했다.
문제는 하급심의 이런 판단이 대법원 판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2008년 “사회 평균인 입장에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한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례를 내놨다. 그런데 대법원은 1993년부터 여러 차례 “자살자의 질병,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주위 상황, 자살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당사자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도 내놨다. 사회 평균인과 당사자를 각각 판단 기준으로 삼은 상반된 판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원에서는 ‘판사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낸 다음 이에 맞는 판례를 가져다 쓴다’는 말까지 나온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의 권동희 노무사는 “대법원이 판례를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