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를 가려주는 것은 투쟁의 불길이다. 투쟁이 과학이다.

한국진보운동의 정체성 확립과 올바른 노선 정립을 위하여

민중의소리
 
입력 2013-08-14 07:00:40l수정 2013-08-14 07:28:58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는 민족사의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넘어 나라의 주권 확립과 조국통일 실현이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에서 진보운동의 정체성과 노선을 명확히 정립해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

한국진보운동의 올바른 노선 정립은 진보운동의 내적 요구이기도 하다. 진보운동의 노선 수정이 필요하다는 잡음이 진보진영 안팎에서 흘러나온다. 변화된 현실을 이유로 들면서 노선 수정을 주장하는 흐름이 그것이다. ‘대중화’ ‘혁신’ ‘새로나기’ ‘민생진보’ ‘생활진보’ 등의 수사로 치장한 수정주의 흐름은 진보 진영의 반미와 친북 이미지, 재벌해체와 같은 과격한 구호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주한미군철수 재검토, 대북관 수정, 재벌해체 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

친미진보는 없다.
친미진보란 좌파신자유주의 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형용모순이며, 진보운동의 노선에서 궤도 이탈한 황당한 궤변이다.

지난해 통합진보당 탈당파들이 작성 발표했다가 세간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 ‘새로나기특위 보고서’라는 문서가 있다. 그들은 보고서에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와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당파가 만든 정의당의 천호선 대표도 얼마 전 인터뷰에서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현명하지도 않다”고 강변했다.

절충이나 타협이 가능한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는 법이다. 굳이 한국의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종속적 한미관계를 극복하자는 것은 진보진영 뿐 아니라 국가적 자존심을 중시하는 보수세력들까지도 동의하는 민족적 과제가 아니던가.

대저 어쩌자는 것일까. 미국의 속국 신세를 벗어나서 당당하게 자주독립국가로 살아가자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면 영원히 속국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반미가 ‘현명하지 않다’면 언제까지 친미 노예로 연명해야 한단 것인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말이라고 믿기 어렵거니와 하물며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넋 빠진 주장을 스스럼없이 늘어놓는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친미진보의 본색이라는 사실이다. 친미진보가 형용모순이자 황당한 궤변인 이유의 하나이다.

박근혜 정부가 전시작전권 환수를 재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군작전권은 독립국가의 징표일 뿐만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고 유신 독재자 박정희조차 추진했던 일이다. 지난 7월 30일 미상원 군사위원회 인준 청문회에서 커티스 스카파로티 주한미군사령관 지명자는 전작권 이양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대하여 “2015년 12월로 정해진대로 이양하는 게 좋다”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돌려달라고 하고 미국이 연기하자고 주장해야 할 터인데, 주객이 전도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수구세력이 이런 주객전도의 넋두리를 내뱉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국내 정치를 보수화시켜 나감으로써 진보 진영의 정권 장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지지기반이 취약하고 정통성 없는 권력의 정권유지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타당한 지적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에 대한 태도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점의 하나로 된다는 사실이다. 친미진보가 형용모순이자 황당한 궤변인 또 하나의 이유이다.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여러 나라 대사관을 대상으로 미국의 정보기관이 무차별적인 도감청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해당 나라들이 모두 항의해 나섰지만, 유독 박근혜 정부만은 ‘사실관계를 알아봐야 한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것은 주권국가의 자존에 관한 문제이다. 미국의 주권유린이라는 제국주의적인 횡포 앞에서 끽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나라가 어찌 독립국가란 말인가.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뿌리 깊은 사대주의이다. 숭미(崇美)의존사상과 공미(恐美)사대의식이 골수에 사무친 나머지 민족자주의 넋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자주권은 국가의 생명이다. 반미를 외면한 채 진보를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의 모순에 다름 아니다. 친미진보가 형용모순이자 황당한 궤변인 다른 하나의 이유이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철수를 재검토하고 ‘민생진보’로 노선을 수정하자는 주장은 어떤가. 주한미군은 한미관계의 상징이다. 파견국 군대는 파견국가(미국)가 그 주둔비를 부담하는 것이 국제법의 원칙이다. 주한미군의 유지비를 미국이 부담한다는 한미소파 규정(제5조1항)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2009~2013년(8차 협정 기간) 모두 4조5000억원의 방위비 분담금을 지급하였는데, 여기에 직·간접지원비를 포함하면 무려 10조원에 달한다. 예컨대 2010년도 한국의 직·간접지원은 직접비 8561억원(방위비 분담금 7904억원 포함)과 간접비 8188억원을 합해서 1조6749억원이었다. 주한미군이 쓰지 않고 현금으로 보관하고 있는 방위비 분담금 잔액이 4월 현재 7380억원에 이르고 우리 정부가 미국에 주기로 했지만 용처가 정해지지 않아 미지급 상태인 미사용액 5317억원까지 합치면 무려 1조2697억원의 방위비 분담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엊그제 정부가 발표했다가 엄청난 조세저항 여론에 부딪혀 원점 재검토하기로 한 ‘2013년 세법개정안’의 세수효과를 분석한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실에 따르면 5년간의 세수 증가는 2조4천9백억원이라고 한다. 1년에 5천억원 남짓으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의 절반 수준이며 주한미군 지원비 총액의 1/4 수준이다. 주한미군철수 재검토와 ‘민생진보’ 주장은 자가당착의 모순이며, 오히려 주한미군철수가 ‘민생진보’라는 역설이 확인된다. 자주 없이 민주(민생) 없다는 진리가 입증되는 셈이다. 주한미군철수를 재검토하고 ‘민생진보’로 노선을 수정하자는 주장은 혹세무민의 황당한 궤변에 불과하다.

한미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한 외교정책의 하나가 아니다. 한미관계는 종속적인 한미군사동맹과 불평등한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의하여 결박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외면한 채 이 땅의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자주적인 독립국가라는 착시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그릇된 현실 진단에 기초하여 진보운동의 노선 수정을 강변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실천적 오류로 귀결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변화된 현실을 이유로 들면서 노선 수정을 주장하고 있지만, 본질은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현실 인식에 대한 왜곡과 수정을 기도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부른다. 친미진보란 과학적인 운동 노선에서 궤도 이탈한 수정주의 노선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는 반미일 수밖에 없다. 친미진보는 없다!


(2)

친미진보는 반북진보와 결합하여 그 본색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북진보는 분단체제가 낳은 희대의 괴물이며 최악의 반진보 악성종양이다.

언필칭 진보의 ‘대중화’와 ‘혁신’을 주장하며 진보운동의 노선 수정을 주장하는 이들이 종당에 이르러 꺼내드는 카드가 소위 대북관 수정이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지난 6월 국회 연설에서 “분단과 전쟁을 겪은 이념적 트라우마와 안보 불안을 깊이 주목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보수언론은 일제히 ‘진보의 반성문’이라고 대서특필하면서 ‘다시는 종북세력과 손잡지 마라’, ‘진보=종북이라는 도식을 깨라’고 얼치기 충고까지 곁들였다. 수구언론들의 찬사와 함께 충고라니…. 이 나라 반북진보의 참상이 아닐 수 없다.

대북문제는 진보 진영에게 줄곧 상당한 중압감으로 작용하는 요인이었던 게 사실이다. 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심지어 ‘내재적 접근론’조차도 친북이라는 색깔론 이념공세의 포화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년 전 벌어진 송두율교수 사건이 진보 진영에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진보 진영 내에서조차 북의 존재를 진보운동 성장의 질곡으로 여기는 이가 없지 않으며, 민주개혁세력은 종북주의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서 자기검열에 열중하고 있는 형국이다. 종북유령소동이 낳은 최악의 기괴한 존재가 바로 반북진보라는 괴물이다.

우리는 분단체제 아래 살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국방 문제를 막론하고 북한 문제가 최대의 변수로 작용하는 나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언제든지 출몰하는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작금에 목도하고 있듯이, 국정원 대선 개입처럼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국기문란사건조차 NLL 논란으로 물타기 돼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 역시 분단체제의 자화상이다. 수구세력의 종북공세가 작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를 파괴하고 새누리당 재집권의 결정적인 지렛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곧 종북유령소동을 물리치지 못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수구세력의 정권찬탈을 막을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준다. 종북유령소동을 끝장내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피하며 자기검열을 내재화하는 것은 분단체제의 ‘레드컴플렉스’가 낳은 비극이다. 자기검열의 내재화 수준을 뛰어넘어 반북진보로 노선 수정을 하자는 것은 희대의 희극이 아닐 수 없다. 반북진보를 분단체제가 낳은 희대의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대북관의 본질은 분단체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다. 분단체제가 극복 대상인지, 평화적인 관리 대상인지에 대한 판단의 차이다. 분단체제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이해하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면 간단히 풀릴 문제다. 분단의 기원이 강대국의 패권주의적인 지배와 개입에서 비롯된 것이며,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하루빨리 분단체제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식이다. 요컨대 통일의 주체는 우리 민족이며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으로부터 북은 대화와 협력, 연대를 통한 통일의 반쪽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 내에 혼란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단체제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국진보운동의 외적 변수로 바라보는 분단의식이 내면화된 결과이다. 남과 북을 하나로 보는 전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남과 북을 이질적으로 갈라보는 반쪽짜리 외눈박이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결국 통일은 필요하지만 눈앞의 현실성 없는 당위적인 원칙일 뿐이고 오히려 평화체제를 지속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국진보운동의 통일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현실성을 이유로 원칙을 수정하자는 것이 바로 수정주의의 본질이다. 평화적인 분단체제 관리는 ‘영구 분단’에 다름 아니다. 반북진보를 분단체제가 낳은 희대의 괴물로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반북진보는 친미진보와의 결합을 통하여 최악의 반진보 악성종양으로 변질된다. 친미와 반북이 결합되면,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북을 반대한다는 극단적인 민족분열 대북대결 논리가 출현한다. 민족공조를 실현하여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물리치기는커녕 외세와 공조하여 민족의 분열과 대결을 조장하자는 천인공노할 매국배족의 궤변이 조작되는 것이다. 사대매국사상에 찌든 자들은 심지어 한미 혈맹(血盟)이란 말까지 서슴지 않는데, 이는 일제가 강요했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제 입으로 서슴없이 뇌까리는 격이다.

민족의 내분을 조장하고 외세와 손잡고 전쟁마저 불사하자는 친미반북은 결코 ‘애국애족’의 진보일 수 없다. 친미반북진보란, 당나라의 용병을 마다하지 않고 당라(唐羅)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를 공격했던 매국배족의 무리가 ‘삼국통일’이라고 역사를 날조하는 것과 똑같으며, 노노간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본과 한통속이 되어 동료 노동자들에게 백색테러를 감행하는 자들이 감히 ‘노동계급’을 참칭하고 진보를 자처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반북진보를 희대의 괴물이자 최악의 반진보 악성종양이라고 규정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이다.

‘민생진보’ ‘생활진보’ 노선을 진보운동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진보=복지’라는 등식을 역설하곤 한다. 묻건대 분단체제가 유지되는 조건에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과연 복지가 가능한가? 분단체제 극복과 평화통일이 빠진 유럽식 복지국가론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한 착각이거나 관념적 허구에 불과하다. 하물며 군비감축을 우선하지 않고 증세론부터 역설하는 얼치기 좌파들에 대해선 길게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숭미(崇美)사대주의에서 숭구(崇歐)사대주의로 전향한 지적 얼간이들에 불과하다는 한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난 2010년의 기억이 생생하다. 진보개혁세력은 6.2 지방선거에서 2009년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시작한 무상급식 구호를 앞세워서 복지 의제를 전면화하기 위하여 야심찬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선거를 두달여 앞둔 3월 26일 천안함사건이 터지자 복지 의제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같은 해 정기국회에서 야권은 ‘4대강 예산 삭감하여 서민복지 확충하자’며 투지를 가다듬고 예결위 심의를 별렀다. 그러나 이것 역시 11월 23일 연평도포격전이 발발하자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당시 민주당은 4대강 예산을 삭감하되 국방예산을 증액하자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남북대결의 분단체제 극복 없이 복지 없다는 것이 냉엄한 이 나라의 현실이다. 통일 없이 민주(복지) 없다는 진리가 입증되는 셈이다.

한국의 GDP 대비 ‘국방비 등 질서유지관련 지출’의 비중은 OECD 주요 국가 중에서 최고 수준으로 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이런 과도한 군사비 지출 구조에서 복지는 한갓 신기루일 뿐이다. 기실 평화가 없다면 복지는커녕 국민의 생명과 안전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분단체제는 수구냉전세력이 기생하는 터전이자 온상이다. 설령 분단체제의 타파가 아니라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과 군비감축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정전체제 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을 가로막는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북측은 일관되게 평화협정 체결과 군비감축을 주장해왔으며 마침내 지난 2월 정전협정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그 추종세력은 60년이 경과한 낡은 정전협정 고수에 사활을 걸고 매달리고 있다. 진보운동의 통일 노선을 수정하고 반북진보를 주장하는 자들이 얼마나 현실을 심각히 왜곡하고 황당한 궤변을 일삼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반북진보를 희대의 괴물이자 최악의 반진보 악성종양이라고 규정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이다.

혹자는 이런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북에 대한 비판은 금기인가, 서로에 대하여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표현의 자유가 있거늘 어느 누가 할 말을 가로막을 수 있는가. 권력승계와 인권 문제이건 예속과 독재의 문제이건 ‘할 말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되 상대방 반쪽의 체제를 존중하고 상호간에 비방 중상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체제를 부정하고 비방 중상하는 언포(言包)를 쏘는 것은 적대와 대결을 부추기는 것이지 화해와 협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대북관이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를 구분하는 기준점의 하나로 된다는 사실이다. 북 체제의 붕괴를 선동하고 북을 적대적으로 헐뜯는 반북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종북유령소동은 승승장구하는 강자의 위세가 아니라 패배의 궁지에 몰린 약자의 발악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종북주의 공세는 일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북관계가 일시 개선되기만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유령에 불과하다. 우리 국민은 6.15 10.4 시대 10년의 학습효과를 통하여 그 유령의 실체를 이미 간파한 바 있다. 수구독재정권이 종북유령소동에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것은 7천만 겨레가 하나 된 남북의 화해협력과 자주통일의 위력에 기겁을 하였던 트라우마 때문이다. 더구나 한반도 정세는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이행기로 전환하는 대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니 분단체제에 기생해 온 수구세력이 ‘종북주의 척결’라는 외마디 비명을 되뇌이면서 가련한 몸부림을 치는 것은 최후의 발악에 다름 아니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올수록 막다른 궁지에 몰린 어둠의 세력은 더욱 미친 듯이 발광하며 날뛰게 마련이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지도 모른 채.

장구한 5천년 민족사에 비춰보면 분단 세월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눈앞에 다가오는 통일의 광명을 보지 못한 채 분단의 어둠에 질식되어 자기검열의 내재화와 분단의식의 내면화로 민족자주의식이 마비될 때 출몰하는 괴물이 다름 아닌 반북진보이다. 반북진보는 분단체제가 낳은 희대의 괴물이며 최악의 반진보 악성종양이다. 분단체제 한국 사회에서 진보는 연북일 수밖에 없다. 반북진보는 없다!


(3)

올바른 노선과 함께 과학적인 방법론도 진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투쟁하지 않는 노조는 민주노조가 아니듯이 ‘투쟁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진보가 역사발전의 방향이며 자주/민주/통일이 나라와 민족의 빛나는 미래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결코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 진보는 민중의 투쟁을 통하여 그 대의를 실현해왔다. 민주노조가 노동자의 계급적 본성에 부합하는 자주적인 조직이지만 그것은 거저 주어지거나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노동자가 고귀한 목숨을 바치고 구속과 수배, 해고와 징계의 온갖 탄압을 이겨내면서 가열 처절한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소중한 성과물인 것이다.

진보의 대의를 실현하자면 그것을 담당하여 수행할 주체역량이 준비되어야 하며 과학적인 실현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주체역량이 준비되지 못하고 과학적인 실현 방법이 마련되지 못할 때에는 진보를 지향하는 민중의 자주적 요구는 한갓 염원에 그치고 만다. 민중은 투쟁을 통하여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왔다. 진보의 역사는 민중이 낡은 지배체제를 깨뜨리고 해방의 새 세계를 창조해온 투쟁과 건설의 발자취이다.

지배층의 선의에 호소하여 사회의 불합리함을 뜯어고칠 수 있다는 사고는 착각이고 망상이다. 탐욕과 착취, 특권과 반칙을 본성으로 하는 낡은 지배세력에게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환상이다. 역사무대에서는 지배계급과 그 하수인들이 계급협조론을 꺼내들고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혹세무민하면서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가로막아보려고 책동하기도 하였다. 계급협조주의자들은 진보운동 내부에 사상적 혼란을 조성하고 조직적 분열을 획책하며 투쟁하는 민중의 앞길을 가로막는 해독을 끼치기도 한다. 지배계급의 선의나 계급협조에 기대를 거는 것은 진보운동을 망치는 길이며 투쟁을 거세한 운동은 진보가 아니다.

지난 2월 당시 정의당 노회찬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자리와 복지를 위해서는 박근혜 정부와 전략적 동맹을 맺을 준비가 돼 있다. 보수와 진보의 전략동맹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회찬·조준호 정의당 공동대표는 다음날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일자리와 복지문제 해결, 노동 중시 사회를 위해 박근혜 정부와 전략동맹을 맺을 자세가 돼 있다고 밝혔다. ‘계급협조론’, 이것이 바로 새 진보를 자칭하는 자들의 본색이다.

대선패배와 박근혜 정권 등장을 충격으로 받아들면서 ‘멘붕’과 ‘힐링’을 하소연하더니만 어느새 입장을 돌변하여 ‘전략동맹’이라니…. 그 충격적 변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쓴 이성복의 시 구절에 빗대면 “민중은 고통스러운데 그들(자칭 새 진보)은 아무렇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민중의 불행과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싸우지 않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내면의 열망을 드러낸 것일 게다. 권력의 선의에 기대어 청원과 시혜의 방법으로 민중의 고통과 불행을 가실 수만 있다면야 누가 반대하겠는가. 박 대통령의 시혜로나마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농성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착각이고 망상임을 굳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 천의봉의 눈물로 반박해야 할까. 박근혜 정부와의 '전략동맹'에 대해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는 분명한 선을 그은 바 있다. 당시 통합진보당 대표로 합의 추대된 이 후보는 2월 8일 대전 유세에서, "우리는 동맹이라는 말을 노동자 농어민 민중과 동맹을 말할 때 외에는 쓰지 않는다"며 "사대매국의 뿌리, 분단 독재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해 온 집권 수구세력은 청산의 대상"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청산의 대상에게 ‘전략동맹’을 구걸하는 ‘계급협조론’, ‘싸우지 않는 정치’를 진보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진보운동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의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다. 민의를 거역하는 거대 여당의 전횡에 맞서서 살신성인의 자세로 온몸을 던져 투쟁하지 않으면 의회주의의 포로로 전락하여 민심의 외면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국정원 대선공작 규탄투쟁에서 보여준 민주당의 행태가 전형적이다. 애초부터 국조특위 합의는 민주당 지도부의 원내교섭력이 뛰어나서 얻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략부재와 무능한 지도력이라고 지탄받고 있었다. 새누리당이 국정조사에 마지못해 응한 것은 성난 민심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국정조사가 시작되자 새누리당이 온갖 트집과 시비질로 회의를 파탄내고 조사를 무력화시키는 적반하장의 작태를 서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한동안 원내교섭에 연연하다가 새누리당에 질질 끌려다니는 주객전도의 수모를 당하였다. 민주당이 서울광장에 천막을 치고 장외투쟁에 나서자 거들떠보지도 않던 새누리당이 협상카드를 꺼내들고 원내로 복귀하라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야성(野性)을 상실한 야당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지다. 야당이 의회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순간 여당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피동에 빠져 끌려다니게 마련이며, 심지어 여당의 이중대로 전락하여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기도 한다. 권력을 궁지로 몰아넣는 강력한 대중투쟁 없이 원내에서의 교섭과 협상만으로 민의가 제대로 실현될 리 만무하다. 오늘의 현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현 시기 진보의 기준은 투쟁에 대한 태도이다. 투쟁이냐 투항이냐? 이것이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의 차이다. ‘의회주의’, ‘싸우지 않는 정치’를 진보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정리해고와 손배가압류로 인해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졌고,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량 해고와 진주의료원 강제 폐업 조치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렸으며, 쌍용차의 천막이 강제철거되고 현대차의 철탑농성이 해제되었다. 농업피해 대책으로 마련된 FTA보전기금이 동부팜한농이라는 재벌대기업의 농업생산 진출에 지원돼 농민의 원성이 빗발친 데 이어 설상가상으로 한중FTA 밀실협상이 추진돼 한국 농업이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노예적인 ‘갑-을관계’의 횡포로 파산에 직면한 자영업자들이 잇따른 죽음으로 그 참상을 고발하면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누적된 민생 위기가 곳곳에서 생존권 투쟁으로 분출되고 있다.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민중의 저항과 투쟁이 갈수록 그 빈도와 강도가 격화되는 양상이다. 노동계는 9월 철도민영화 저지를 위한 파업, 10월 호봉제 쟁취를 위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예고되어 있다. 민중이 고통과 불행의 화근을 뿌리뽑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방법은 투쟁뿐이다. 투항은 죽음이요 투쟁만이 살길이다. 그런데 투쟁을 선도하고 책임져야 할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운동 지도부 일각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대중의 분노와 저항에 주목하고 투쟁의 불씨를 잘 살려서 큰 규모의 대중투쟁으로 책임있게 승화 발전시키는 것이 지도부의 역할이다. 지도부가 투쟁을 꺼려하고 회피한 채 의회 문턱이나 기웃거리게 되면 대중의 투쟁의지에 찬물을 끼얹게 되고 종당에는 규탄을 면치 못한다. 강력한 투쟁 없이 합법적인 청원과 타협의 방법으로 대중의 요구를 실현해보려는 것은 착각이고 망상이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 민중과 함께하지 않는 운동은 진보가 아니다. ‘합법주의’, ‘투쟁하지 않는 진보’를 진보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이다.

민중은 투쟁을 통하여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간다. 진보운동의 과학적인 방법은 투쟁이다. 권력의 압제와 운동의 침체를 극복하는 비법 역시 투쟁으로 시련과 난관을 돌파하는 것이다. 탄압이 극렬하고 분위기가 침체되고 조직역량이 부족해서 투쟁을 전개하기 어렵다고 물러나 앉아있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가열차게 투쟁을 전개해서 조직역량을 키우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탄압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대중운동 침체의 여파와 대선 패배의 후유증이 겹치면서 진보운동 일각에서 한때 이상 기류가 나타나기도 했다. 민주노조 출신 전현직 간부들이 기성 야권에 줄을 서고 사민주의 사조가 반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촛불투쟁이 활활 타오르면서 진보운동 내부에서 혼란과 분열을 조성했던 난기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촛불에서 횃불로 번져가는 투쟁의 불길 속에서 안철수 환상의 실체가 드러나고 거품이 빠지고 말았다. 알맹이와 쭉정이를 가려주는 것이 풍로의 바람이듯이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를 가려주는 것은 투쟁의 불길이다. 투쟁이 과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투쟁하지 않는 진보’를 진보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객관적으로 국제 정치질서의 변화와 한반도 정세의 대전환기가 도래했고 주체적으로 한국진보운동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하는 조건에서 오늘 한국진보운동의 정체성 확립과 올바른 노선 정립은 절박한 시대적 요구이다.

한반도 정세의 역동적인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바야흐로 60년 정전체제가 무너지고 평화체제로의 이행이라는 대전환기로 접어들었다. 정세가 자주/민주/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추세이다. 자주의 여명이 밝아오고 통일의 서광이 비쳐오는 역사의 대전환기에 자주/민주/통일의 깃발을 들고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한국진보운동의 역사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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