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노동의 가치

강신주 | 철학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이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마이클 샌델의 신간 서적이다. 이 책을 통해 그는 과거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사게 된 현실, 그러니까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개탄만하고 있을 뿐, 샌델은 그 이상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실을 냉정히 진단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사태를 관조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샌델은 질문을 잘못 던졌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물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돈으로 팔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남아 있는가? 억만금을 주어도 팔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과 돈으로 팔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가 돈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자본가의 입장에 서있는 질문이라면, 후자는 돈을 가지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노동자의 입장에 근거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결국 샌델의 논의가 잘해야 ‘노블리스 오블리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우리가 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가진 자의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샌델의 정의론이다. 그렇지만 돈을 가진 자는 언제든지 자신의 윤리나 의무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샌델의 이야기가 항상 순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전체기사^|^" borderStyle="none">

우리가 가진 수많은 소중한 것들 중 자본이 사활을 걸고 사려는 표적은 무엇일까? 우리의 사랑도 용기도 가족도, 그리고 자존감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노동이다. 하긴 노동을 살 수 없다면, 자본가는 아무리 금고에 돈이 많아도 몸소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할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가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본주의의 맹목적 의지가 피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의 노동을 구매해서 자본가는 자연과 직접 씨름하는 육체노동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백장(百丈) 스님의 청규(淸規)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그러니까 하루 노동하지 않았다면 그 하루만큼 먹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누구나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큰스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긴 노동하지 않았는데도 무엇인가를 먹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빼앗았다는 것 아닌가. 큰스님이 죽을 때까지 쟁기를 놓지 않았던 속내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돈으로 노동을 산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의지, 그러니까 백장 스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가 기꺼이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자본가의 의지에 복종하는 굴욕을 감당하려고 하겠는가?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당당한 주체로 살려는 자유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팔지 않으면 살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혹은 자본가가 숨기려고 하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우리도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을 자본가가 모를 리 만무하다. 당연히 자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보호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방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팔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애써 팔라고 유혹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소중한 것을 들고 나와 팔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돈이 가장 중요하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돈으로 팔릴 수 있는 노동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돈으로 팔릴 수 없는 노동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빈곤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리해고를 수행하거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도 좋고, 아예 취업문을 좁히는 것도 좋다. 이처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우리가 내다팔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무엇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획된 것이다. 팔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사려고 하는 구매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자본가는 회심의 미소를 던질 것이다. 이제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만 하면, 우리는 알아서 그것을 준비할 테니까 말이다. 영어회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토플과 토익을 파고들 것이다. 혹은 매력적인 외모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형수술까지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노동은 양분되어 버린다. 돈과 바꿀 수 있는 노동과 돈과 바꿀 수 없는 노동. 물론 이런 분할에는 전자의 노동만 가치가 있고, 후자의 노동은 무가치한 것이라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이제 음악을 감상하는 것, 적벽가를 완창하는 것, 친구들과 여행하는 것, 프루스트의 소설을 완독하는 것 등등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로 음악을 듣는다고, 소설을 읽는다고, 혹은 여행을 간다고 돈과 쌀이 나올 리 만무하니까. 그렇다면 정말 자본에 의해 팔린 노동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사실 우리가 돈으로 바꾸어버린 노동보다 더 가치가 있었던 것은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노동이 가치가 있다고 선전하면서, 노동의 가치는 오직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도 모를 일이다.

돈이 가장 중요하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돈으로 팔릴 수 있는 노동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돈으로 팔릴 수 없는 노동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진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동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본이 좋아하는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노동의 소외다. 가령 적벽가를 부를 때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끼는 젊은이가 있다고 해보자. 금융회사에 취업하려고 할 때, 그는 과연 적벽가를 부를 때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당당히 면접관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비극적인 일 아닌가? 억만금을 주어도 팔 수 없는 것이 이제는 팔리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어서 숨겨야만 하는 현실이 말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옛날 어느 스님은 매일 일어나자마자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주인공! 잘 계시는가!” 스스로 삶의 주체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매일 되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보게!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팔 수 없는 것이 자네에게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때 우리의 뇌리에는 노동 이외에 부모님, 자식들, 애인, 사랑, 자존심, 용기 등등 아마 수많은 사람과 가치들이 스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생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산도 옮길 수 있다는 고사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억만금을 주어도 절대로 팔 수 없는 영역을 하나씩 하나씩 되찾는 어리석은 사람, 즉 우공(愚公)이 되어야만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본가가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주체로 거듭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행복이 우리의 삶에 조용히 찾아오게 될 것이다. 너무나 단순해서 그만큼 너무나 어려운 행복의 길을 누가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공이 되기에 너무나 약아져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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