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퍼온글] “KT노조 탈퇴가 민주노총 위기? 전화위복의 기회다”
작성자: 조하번 | 조회: 884회 | 작성: 2009년 7월 20일 8:47 오후"KT노조 탈퇴가 민주노총 위기? 전화위복의 기회다"
[기고] 보수화-어용화, 구분 못하는 민주노총의 오류
조합원 3만 명의 KT노조가 지난 17일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KT노조는 "새로운 전략과 비전을 겸비한 노동운동을 바라는 조합원들의 결단"이라고 말했다.
이 일로 해묵은 '민주노총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올해 들어 인천지하철,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대형 사업장이 민주노총을 잇따라 탈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KT노조의 탈퇴와 관련해 "몇몇 노조의 탈퇴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럴 조직도 아니"라고 대응했다. 그렇다면 KT노조의 탈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사건을 지켜보며 KT노조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지난 2006년 노조로부터 제명된 이해관 씨가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KT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그것도 95% 압도적 찬성으로. 보수 언론은 환영일색이다. 망언 전문가 김동길은 "민주당은 KT노조를 배우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안다. KT노조가 이미 오래 전에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는 것을. 이는 곧 KT노조의 탈퇴에서 중요한 것은 시점이었을 뿐이며, 그 자체가 민주노총에게 중대 변수가 안 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더 많이 안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대기업노조도 KT노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그래서인지 보수 언론은 이참에 탈퇴 도미노가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 어린 관측을 쏟아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KT노조의 탈퇴에 대해 우리가 보다 근원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아무리 지금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가 부활하고 있다 하더라도 KT노조의 탈퇴를 민주노총 죽이기를 위한 '정권 차원의 공작'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게다가 정작 그 주체인 노동자의 시각이 빠진 이런 관점은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한국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특히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보수화됐다. 그 이유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중산층 진입에 성공했다는 객관적 상황과 더불어 노조 자체의 주체 역량도 개량화 됐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노조의 보수화가 일정하게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 공세는 대기업 노동자로 하여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즉, 구조 조정 반대에 집중하는 노동운동을 만들었다. 또 한편, 세계화로 인한 무한 경쟁은 기업 차원의 노사 협조주의로 나타났다. 심지어 일부 현장에서는 노골적인 어용노조마저 다시 생겨났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어용화'와 '보수화'를 구분하지 못했다. 이른바 '국민파'라고 불리는 의견 그룹은 KT노조를 그저 보수화된 집단 정도로 파악했다. '총연맹에 내는 조합비를 꼬박꼬박 내면 민주노총의 구성원으로 훌륭한 것 아니냐'는 매우 안이한 인식이 그들에게 있었다. 심지어는 '어용 KT노조'의 엄청난 대의원을 활용해 민주노총의 집행권을 장악하는데 동원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럼이 없기도 했다. 투쟁 기금도 없는 처지라 맹비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많은 비정규직노조의 의결권은 제한하면서 민주노총의 지침을 단 한 번도 실천하지 않은 KT노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결권 제한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용 KT노조'를 민주노총이 제명할 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KT노조가 필자를 제명했을 때, 당시 조준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KT노조를 제명해야 한다면 민주노총에 남아있을 노조가 없다"고까지 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문제는 보수화와 어용화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조준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지적대로 보수화를 이유로 민주노총에서 KT노조를 제명해야 한다면 많은 대공장 노동조합이 제명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KT노조는 단순히 조합원이 보수화된 게 아니다. 철저히 어용화된 노조였다. 민주노조의 기준이라고 얘기하는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자주성은 전혀 없다. 모든 노조 활동이 회사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심지어 민주노총 선거에조차 회사 노사협력팀 직원이 사찰을 하다가 적발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민주성? 완전 꽝이다. 자유당 시절에나 횡행했던 공개 투표는 물론 개표 조작까지 다반사로 일어난다. 연대성이야 더 말해서 무엇할까! 최초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었던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의 투쟁을 끝까지 외면했던 게 '어용 한국통신노조' 아니던가!
노동자가 늘 진보적이라면 노동운동은 불필요할지 모른다. 노동자도 때로는 보수적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누구도 지금의 한국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보수화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 기반을 둔 모든 노조가 어용화된 것은 결코 아니다. 보수와 어용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용화를 보수화로 분칠한, 그런 정파적 관점이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KT의 민주노총 탈퇴를 '정권의 공작'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KT노조에 '탈퇴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옹색한 모양새를 연출하게 만들었다.
이제 옥석이 가려지고 있다. 물론 민주노총이 겪을 어려움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KT노조의 탈퇴가 장기적으로는 결코 민주노총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의 조건에서 그리고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보수화된 노동운동의 흐름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와 같은 노동의 대공세로의 전환은 더 많은 시간을 요하겠지만 적어도 KT노조처럼 확실히 어용화된 조직이 아니라면 어떤 수준에서든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닌가!
그런 면에서 KT노조 탈퇴를 민주노총이 '전화위복'의 계기로 보는 자신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얼마 되지 않지만 KT에는 여전히 훌륭한 노동자들이 있다. 비록 보수화되었지만, 적절한 계기를 만나면 KT 노동자들도 지난 1995년 세상을 흔들던 그 기세로 자신의 가슴 속에 쌓아둔 분노를 터뜨릴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이해관 前 KT노조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