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판’이 바뀐다.

“법과 원칙 대신 정치적 타협 택한 한국 노사문화 20년 노사 함께 변화의 길 들어서”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후반부터 20년간이 사용자의 시대였다면 민주화가 시작된 198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는 노동자의 파업이 활기를 띤 시대였다. 1987년 민주화 바람 이전에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사실상 흔적이 없었다.
반면 88년 노태우 정권 이후 지난 노무현 정권까지 노조의 파업은 한국 경제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과 같았다.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 투자를 망설일 때면 어김없이 강경 노조를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대립과 투쟁 위주로 노사 문화가 흐른 데는 강경노조가 대우 받는 노동계의 문화와 강경투쟁에 쉽게 굴복하는 사용자들의 습성이
가장 큰 이유다. 여기에 그동안 정부도 노사문제를 법적으로 풀기보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등 문제를 악화시켜 왔다.

‘법과 원칙’은 없고 ‘정치적 타협’만이 노사 간에 존재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노조전임자 제도다.
미국, 일본은 물론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노조 전임자의 임금을 회사가 전적으로 지급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도 1997년 노조법으로 전임자의 회사로부터 급여 수령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부칙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시행이 유예돼 올해 말까지 사문화돼 있는 상태다.

[투쟁 일변도 노동운동 자성 바람]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을 금지한 조항이 유야무야되면서 전임자 수가 필요 이상으로 늘어 노사관계가 악화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노사관계 현장에서 정치적 타협 못지않게 정치권에서 노조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룬 것도 큰 문제다.
실제 정권 초 친노동자 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는 취임 첫해에만 320건의 파업으로 총 129만8663일의 근로손실일수를 기록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당선자 신분으로 “현재는 경제계가 힘이 세지만 향후 5년 동안 이런 불균형을 시정할 것”이라는 말로 노동운동에 불을 붙였다.
반면 법과 원칙을 강조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파업은 108건, 근로손실일수는 총 80만9402일로 뚝 떨어졌다.
물론 상황이 다른 2003년과 2008년을 수평 비교할 수는 없지만 현격한 숫자 차이는 법과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런 변화는 올 들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경제의 어려움으로 올해는 5월 6일 현재 파업이 18건에 불과하고
근로손실일수(5만1226일)도 지난해 같은 기간(16만31일)에 비해 68%나 줄었다.
지난해에는 이명박 정부가 법과 원칙을 내세우면서 습관적으로 파업을 하던 철도와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벌이지 않았고
더 나아가 올해는 6개 지하철 노조가 민주노총 탈퇴를 시행 또는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공공운수연맹 소속 6개 사업장(해양환경관리공단·진해택시·영일운수·인천지하철공사·인천국제공항공사)과
화섬연맹 소속 4개 사업장(서해파워·SEETEC·NCC·영진약품), 지역노조 소속 1개 사업장(승일실업)도 이미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대학노조 소속 단국대와 서비스연맹 소속 그랜드힐튼호텔도 민주노총을 빠져나갔다.

이 외에도 여러 개의 사업장에서 강경투쟁 위주의 민주노총 탈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변화의 조짐은 민주노총 탈퇴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여러 기업이 무교섭 임단협 타결이나
항구적 노사평화 선언, 임금동결과 고용보장 합의 등으로 소모적인 대립을 청산하고 있다.
지난 20년간의 강경투쟁 일변도의 기조에 서서히 변화가 오고 있다.

 

[경영성과 투명하게 공개하는 기업 늘어]

독자적인 노조 운영으로 대형사업장 중 노사 신문화를 이끌고 있는 현대중공업의 오종쇄 위원장은
지난 3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강경노조는 왜 투쟁하는지도 생각해 보지 않고 관습적으로 투쟁만을 외치고 있다”며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 민주노총을 탈퇴한 인천지하철노조의 이성희 위원장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노총에 대해 “운동방식이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이번 변화는 노동계 내부에서 불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노사 문화에 질적 변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때마침 사측에서도 노조의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경영진은 임단협 무교섭 합의에 고용보장과 경영진의 급여 반납으로 호응했고,
SKC의 최신원 회장은 노조의 임금동결과 상여금 반납에 급여 전액 반납으로 화답했다.
노조에 경영 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기업이 늘고 있고, 긴축을 하면서도 성과가 있을 때 공정하게 나누는 관행도 정착되고 있다.

기업 내에서도 노사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임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런 전문성 있는 임원과 노조 간부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적대적이기보다 상생적인 관계로 재설정되고 있다. 오랜만에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노사관계에는 그동안의 ‘판’을 바꾼 사람들의 공이 적지 않다.
때론 손가락질을, 때론 비아냥을 받으면서 기존의 판을 바꾸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해’와 ‘신뢰’를 얘기하고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대화 상대로서 신뢰가 생겨야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한국의 노사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이다.




현장의 목소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