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21명의 미군 포로가 중국에 남았다. 미국 정부는 충격에 빠졌고, 언론은 공산당에 ‘세뇌’당한 매국노라 그들을 비난했다. 뇌를 씻는다는 의미의 ‘세뇌’(洗腦, brainwashing)는 이때 탄생한 말이다. 학자들은 세뇌당한 포로의 심리 상태를, 미 정보기관은 군사적 응용을 연구했다. 때맞춰 20세기 중반, 동서양 모두에서 수많은 신흥종교집단/컬트 운동이 일어났다. 세뇌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바로 이 두 현상에 기대고 있다.세뇌란 한 사람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현상이다.
모든 심리적 변화가 세뇌는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감동받는다고 해서 세뇌당한 것은 아니다. 세뇌는 최면과도 다르다. 최면은 습관 수준에서 일어난다. 세뇌의 도구로 최면적 기법이 사용될 수는 있지만, 최면 자체가 세뇌는 아니다. 한 인간의 사상 전체와 의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특정한 이념을 열렬히 따르게 될 때, 그 과정을 세뇌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부분의 세뇌는 정치/종교적 신념의 변화와 결부된다.
세뇌는 학문적으로 논쟁적인 주제다. 세뇌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조차 세뇌라는 현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 사전’의 세뇌 항목은 “불행하게도 세뇌가 항상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끝맺고 있다. 세뇌란 분명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이다. 캐슬린 테일러의 책 <세뇌: 사고 통제의 과학>은 최근 신경과학의 발견들을 종합해 이 흥미로운 현상을 파헤친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세뇌는 신흥종교집단으로 귀속되는 신도들의 심리과정 속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놀랍게도, 세뇌는 동아시아에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세뇌의 어원 자체가 중국어다. 일본의 옴진리교 테러, 전후 한국에 난립했던 수천의 신흥종교집단, 그리고 북한이라는 컬트적 국가체제에 이르기까지, 세뇌는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와 함께한다. 한국은 북한을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와 무속신앙이 급속도로 융합하며 다양한 컬트 집단을 창조해온 공간이다. 최태민은 그런 집단의 교주였다. 그리고 라이벌 문선명에 비하면, 최태민의 교세는 보잘것없었다. 영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우택의 논문 ‘신흥종교집단에 대한 정신의학적 이해’는 ‘귀속이론’을 다룬다. 컬트 신도들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은 후 컬트에 입문한다. 영애는 어머니를 잃고 최태민을 만났다. 컬트 집단은 바로 이런 신도에게 접근해 친절하게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 과정은 반복되며 신도가 회심 단계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다. 최태민은 처음에는 자신이, 이후에는 딸들이 이 과정을 주도하게 했다. 이후 기존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어 신도를 고립시킨다. 영애는 자신의 친족을 버렸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신비체험이 이 모든 과정을 가속한다. 최태민은 영혼합일법이라는 최면술과 영애 어머니의 육성 모사에 능했다고 한다. 세뇌의 모든 조건이 거기에 있었다.
세뇌를 무력화하는 방법이 있다. 탈세뇌라 부르는 과정이다. 인간의 뇌는 가소성을 지닌 멋진 기관이기 때문이다. 우선 피세뇌자는 세뇌자의 공간에서 이탈해야 한다. 그리고 말초적인 정신상태를 피하고, 이성적인 의식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좋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이런 과정들이 대통령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치료는 자리에서 내려와 받아야 한다. 환자가 국가를 통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