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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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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4일 12:46 오후
아픈 청춘들아, 그대들이 품을 희망은 이것이다편집부 | labortoday
승인 2016.01.04
▲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십 년 넘게 대한민국은 자살률 세계 최고의 나라다. 해마다 1만4천여명이 자살한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명제에 따른다면, 그만큼의 사람이 사회적으로 타살된 것이다. 이 대량 타살은 시장의 힘으로 포장된 자본의 힘과 그것을 폭력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파쇼통치의 결과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등장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파쇼통치는 끝났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사실은 군사파쇼가 민간파쇼로 대체됐을 뿐이다.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을 거치면서 약화되던 민간파쇼(노동자·농민을 때려죽이는 폭력경찰과 이적단체를 만들어 내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속했으므로 파쇼통치가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는 이명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해 활개치게 됐다.
모든 자살이 남은 자들을 안타깝게 하지만 어떤 자살은 더욱 그렇다. 2012년 말 기대와 달리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발표된 직후 노동자들의 연쇄자살이 그랬고, 2014년 세 모녀 자살이 그랬다.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지난해 “제 유서를 퍼뜨려 주세요”라는 글을 남기고 투신한 서울대생의 자살이 또한 그랬다.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이런 절망과 고통의 죽음을 외면한 채 ‘저출산을 해소하는 꿈과 희망의 새해’ 운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희망을 갖고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대생은 유서에 이렇게 썼다. “힘들고 부끄러운 20년이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입니다. 자살은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일어납니다.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저를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20년이나 세상에 꺾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 저와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비합리라 여길 수 있어도 사회에서는 그 비합리가 모범답안입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수저색깔을 논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이곳저곳에 퍼뜨려 주세요.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살고 싶습니다.”
과학고 2학년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그는 분명 머리 좋은 수재다. ‘사랑’을 여러 번 언급한 것을 보면 가슴도 따뜻한 청년이다. 그런 따뜻한 가슴을 가졌기에 돈과 권력과 기득권의 논리가 인간의 가치 위에 군림하는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했고, 그것에 굴복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또 이런 유서를 써서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림으로써 비합리가 모범답안으로 통하는 거꾸로 된 세상에 제 나름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그는 탈출구를 옳게 찾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좌절·비관했고, 우울증을 앓다가 죽음을 택했다. 스스로 “유물론적 사관에 익숙한 사람”이라 했지만 계급투쟁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유물사관을 체화하지 못한 것이다.
비합리적 현실에 대한 탈출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가 유서에서 자기에게 ‘실질적’인 위로를 줬다며 고마움을 표한 친구는 그의 죽음을 접하고 이런 글을 남겼다.
“유서를 읽고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엉엉 울다가, 조금 정신을 차려 세수를 하고, 고맙게도 나를 걱정해 주는 지인들의 전화를 받고, 끊고 나서 또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 유효하지 않은 위로만 가득했을 너의 삶이 나는 너무도 슬프다. 삶에는 고난도 있지만 소소한 기쁨의 존재감도 꽤나 크다고, 그것을 같이 실감해 보지 않겠느냐고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 주변에 누가 힘들어할 때 절대 눈감지 않는 어른이 될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직접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얼마 안 되는 내 주변 사람만큼은 챙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아픈 친구에게 공허한 위로를 하지 않으며 먼저 연락을 자주하며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많이 알려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 S는 힘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위로가 돌아가는 세상을 바랐다. 오늘도 내일도 지겹게 살아남은 나는 그의 말을 기억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지 않은 채 소소한 삶의 기쁨들로 ‘유효한 위로’를 준다고, 부조리한 세상에 절망한 사람의 비관이 극복될 수 있는가. 그는 낙관에 이르는 방법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학생들의 대척점에 한 고등학생이 있다. 그는 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 밀어붙이고 있는 키워드는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입니다. 지금 이 동영상을 보고 계실 분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입니다. 하지만 사회구조와 모순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뿐입니다.”
그렇다. 인간의 가치 위에 금전대의 부피가 군림하는 이 거꾸로 된 세상에 대한 탈출구는 자살이나 소소한 삶의 기쁨이 아니다. 희망은 세상을 바꾸는 것, 자본독재와 파쇼통치를 해체하는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뿐이다.